[특별기고]美보건원 예산 25조 삭감 속 살아남은 ARPA-H, 트럼프를 읽어라
이승규 K-헬스미래추진단 프로젝트 매니저
오는 6월 출범하는 한국의 새 정부는 바이오헬스 분야에 대한 과학기술 정책과 연구개발(R&D) 전략을 재정비할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이와 같은 전환기에, 최근 공개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2026 회계연도 예산안은 큰 충격을 안겼다.
예산안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예산을 전년 대비 179억 6500만 달러(한화 약 25조 원) 삭감하고 27개 연구소 구조를 5개 분야로 재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상 미국의 공공 연구 생태계가 대대적인 구조조정 국면이다. 그러나 이런 대대적인 변화 속에서도 ARPA-H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for Health)는 예산과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이번 예산안이 단순한 예산 감축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NIH 예산안이 주는 첫 번째 메시지는 NIH라는 거버넌스를 축소함으로써 다년도, 다분야 연구 생태계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산안은 특히 NIH가 급진적 젠더 이념, 기후변화 대응 연구, 중복된 기초 분야 등에 편중돼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과감히 구조조정 하겠다고 밝혔다. 심지어 유전자 편집, 기능 획득(gain-of-function) 연구, 중국 연구기관과의 협력 등이 공공 신뢰를 훼손시켰다는 정치적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예산 삭감이 단순한 재정 긴축 조치가 아니며, 다학제적, 자율주제 기반의 공공연구가 정치적 논란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분위기다. 한국도 최근 들어 R&D 사업에 대한 전략성, 성과 중심 평가, 사회적 역할 강화 등이 강조되면서 자율적 기초연구가 위축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바이오헬스 분야 최강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구의 정치화라는 새로운 리스크 요인에 대해 한국의 과학계와 정책당국이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메시지는 NIH 산하 독립조직인 ARPA-H의 생존에서 찾을 수 있다. 트럼프 정부 초기 ARPA-H는 구조조정 대상 기관으로 자주 언급됐다. 바이든 정부의 시그니처 사업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조직도, 예산도 그대로 유지됐다.
ARPA-H는 고위험-고보상(high-risk, high-reward)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빠르고 민첩하게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연구를 추진하는 조직이다. 기존 공공 연구의 한계를 벗어나 민간 협업과 상용화를 중시하며 기술-정책-산업의 연계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조직이 바이든 행정부에서 공식 출범했지만, 조직 신설의 시작은 트럼프 1기 행정부의 HARPA (Health ARPA) 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2019년, 백악관 기술정책국(OSTP)은 국방부 DARPA 모델을 보건 분야에 적용하기 위한 HARPA 설립을 준비하며, 자살 예방, 암 정밀 치료, 알츠하이머 조기 진단과 같은 실용 과제를 주요 타깃으로 검토했다. 이는 ARPA-H가 정권을 초월해 미국 양당이 전략적으로 필요성을 인정받은 조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실용성과 민첩성, 그리고 국민 체감할 수 있는 연구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지속 가능한 R&D 구조로 자리 잡은 것이다.
차기 한국 정부 또한 보건안보 확립, 미정복질환 극복, 산업 초격차 기술 확보, 초고령사회 대응을 위한 복지‧돌봄 서비스 개선, 필수의료 지역완결체계 구축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도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초당적 R&D 추진 체계가 필요할 수 있다. 미국의 ARPA-H 모형은 이에 대해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미국의 예산안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핵심 메시지는 과학기술이 더 이상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 심리연구, 기후변화와 건강의 연계 등 일부 연구 주제를 “급진적 이념”으로 간주해 NIH 예산 삭감의 사유로 제시했는데, 이는 과학의 내용이 정책 지원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연구의 질, 창의성과 같은 전통적인 측면과 아울러 사회적 수용성, 정치적 중립성 등과 같은 새로운 측면이 지속적인 연구 지원 기준으로 추가된 것이다.
최근 들어 한미 R&D 협력뿐 아니라 R&D 성과를 활용한 미국 시장 진출 등을 강화해 가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이러한 미국 내 변화에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연구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성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복합적 연구 평가 체계, 정치적 중립성과 공공성과의 균형을 확보하는 투명한 R&D 전략 체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의 NIH 예산안이 던지는 메시지에 한국의 새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몇 가지 접근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자율적 기초연구 생태계는 보호하되 전략 분야는 ARPA-H 형으로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다. 다만 자유 연구와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한 임무형 연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말고 상호 보완이 가능한 포트폴리오로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형 ARPA-H 프로젝트와 같은 도전혁신형 사업의 적극적 활용이 필요하다. 단순한 R&D 사업을 넘어 사회적 난제 도출, 성과 구조, 민간 협업 및 사업화 방식 등을 포괄하는 제도 개선, 그리고 과학기술을 통한 사회적 난제 해결에 대한 국가적 철학을 주도할 수 있는 구조로 확대‧전환할 필요가 있다. 비록 미국의 일이라 하더라고 과학의 정치화라는 위험요인 발생에 대비한 새로운 연구 평가 체계도 고민되어야 한다.
과학적 정당성과 사회적 수용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다차원 평가 체계를 구축한다면 정치변화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NIH의 대규모 축소와 ARPA-H의 존속은 미국이 바이오헬스 분야 연구개발의 구조와 철학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는 점은 물론, ARPA-H와 같이 양당이 모두 인정한 실용 지향 전략 조직의 필요성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한국의 새 정부는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국제적 환경 변화 대응과 경쟁력 확보를 위해 ‘선택과 집중’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R&D 모델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단순한 지식 생산의 도구를 넘어서 정치적 자산과 그것에 대한 전략적 실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직시해야 한다. 주기적인 정부 정책 변화 속에서도 정책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동시에 사회적 난제 해결에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R&D 구조 혁신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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