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평양냉면의 정치학
(서울=뉴스1) 서재준 외교안보부 부장 = 더워진다. 올해도 평양냉면 먹을 때가 됐다.
평양냉면은 어려운 음식이다. 그 맛에 단박에 녹아들기도 어렵지만, 먹는 법도 제각각이란다. '진짜' 평양냉면이 무엇인지 따지는 논쟁으로 들어가면 일이 커진다.
그렇게 평양냉면은 교조적 음식이 됐다. 냉면 좀 먹어봤다는 사람하고 식당에 가면 한 젓가락 뜨기 전에 들어야 할 강의가 길다.
진짜 평양냉면 논란이 한창이던 2018년, '평양냉면 고수'를 자처하는 평론가들과 인플루언서들은 평양냉면에 식초와 겨자를 넣은 것을 범죄에 가깝게 치부했다. 제각기 '근본'을 주장하며 냉면 먹는 법을 설파했다.
그런데 그때 서울에서 잘 팔리는 평양냉면은 평양에 없었다. 당시 평양의 '랭면'이라는 것은 간장을 푼 짙은 육수에 검은색에 가까운 면과, 붉은 '다대기(혼합양념)'까지 곁들여 먹는 음식이었다.
옥류관 랭면을 먹어봤다는 탈북민에게 왜 다른지 물었다. 그는 "입맛이란 게 유행도 타고, 바뀌는 것 아닌가? 북한도 마찬가지지"라고 답했다. 충분하지 않은 답변으로 인한 궁금증은 북한의 옛 요리책을 찾아본 뒤에야 해소됐다.
정말로 북한의 평양냉면이 바뀐 것이다! 옛 요리책에 담긴 평양랭면의 사진은 지금 서울의 것과 비슷했다. 길게 쓰긴 어렵지만, 애초에 평양냉면은 한 가지 레시피가 아니라고 한다. 제각기 장사하던 국숫집 중 인기가 많은 가게가 살아남고, 이 레시피가 다시 여러 갈래로 퍼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평양냉면 순수령, 근본주의자 등의 교조적 논쟁이 허무해지는 역사다. 정작 냉면은 대중의 입맛에 맞춰 여러 방식으로 진화해 왔을 뿐이다.
올해 첫 냉면을 개시하던 중, 옆자리의 대화를 엿들었다. '면 자르지 말라', '식초·겨자 넣지 말라' 등등 오지랖이 길어진다. 피곤함을 느낀 나의 생각은 엉뚱하게 확장됐다.
요즘 정치도 교조적이다. 시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시민에게 '우리가 하는 게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려 든다. 투표로 위임한 것은 권한이지 권력이 아닌데 말이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한 가지 답만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소리가 큰 소수의 말을 전체의 의견으로 호도하고, 정치 행위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국민, 시민, 대중에게 떠넘긴다.
그사이에 외교는 표류하고 있다.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5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다. 북한은 군사적 질주를 멈추지 않는데, 우리 안보는 방위비분담금·주한미군 역할 변화라는 우방으로부터의 도전도 막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정치가 문제를 풀어가는 적나라한 과정을 국제사회가 고스란히 지켜봤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릴 믿으라' 하는 것은 남에게 냉면 먹는 법 강요하는 것과 별다름이 없다. 자국의 외교에 중상을 입힌 정치권력을 보는 마음은 괴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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