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파리에서 들려온 "빨리빨리"
(서울=뉴스1) 박희진 금융증권부 부장 = "빨리빨리!"
성격 급한 한국인들이 입버릇처럼 자주 쓰는 이 말을 콧대 높은 프랑스 사람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한국어로' 말이다.
매년 4월 이맘때 열리는 가상자산 행사 '파리블록체인위크(PBW)' 참석을 위한 프랑스 출장 동안 내내 귀를 쫑긋하게 만든 일이 바로 어디를 가나 들려오던 파리 사람들의 '한국어'였다.
호텔에선 "어서 오십시오"라며 맞아줬고, 불빛이 반짝이는 에펠탑 모양의 기념물을 파는 노점상들은 "반짝반짝, 이뻐요"라며 말을 걸어왔다. 동양인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곤니치와', '니하오' 등 일본어, 중국어를 들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자국어와 자국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남달라 영어로 물어도 프랑스어로 답하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Are you Korean?"이라고 묻기도 전에 "한국어"로 말을 걸어주는 세상이다. Korea라고 하면 남한과 북한도 구분 못하던 그들에게 한국의 위상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을까.
한국에 직접 가보거나, 한국인 친구들을 사귄 '오프라인 경험' 덕분이 아닐 게다. 온라인에서 간접적으로 K-컬처를 겪어본 영향일 터다. 유튜브로 K-팝이, 넷플릭스로 K-드라마가 국경없이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결과다.
K-컬처 열풍은 온라인 세상의 힘이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은 급격한 산업화로 단숨에 '수출 강국'으로 올라섰지만 요즘 해외에서 불고 있는 '한류'는 문화, 생활방식 등 소프트파워로 요약된다.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한 코리아 파워는 가상자산(암호화폐)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2017년 전후로 빗썸은 세계 1위를 뽐냈다. 당시 비트코인 거래량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이후 1위 타이틀은 해외 거래소에 뺏겼지만 업비트가 세계 4위다. 업비트는 1월 기준 월 거래량이 260조원, 월 사용자(MAU)는 560만 명에 달한다.
이같은 성과에도 정부는 가상자산 거래소에 대해 여전히 '코인쟁이', '사기꾼' 취급한다. 외국인의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이용도 금지했다. 외화벌이에 그렇게 진심이면서도 정부가 해외 진출을 막아놓은 셈이다.
다시 찾은 파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에펠탑은 빛나고, 센강이 반짝인다. 유튜브로 전 세계 각지를 '가상체험'하고, 넷플릭스 하나면 글로벌 콘텐츠를 다 섭렵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파리로 몰려든다. 대체 불가능한 '낭만의 도시', 전 세계인들이 평생 꼭 한번 가고 싶어하는 오프라인 명소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나라'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에겐 에펠탑이 있고, 센강이 있다.
한국의 경쟁력은 오프라인 세계, 이 작은 땅덩어리에 있을까? 주 52시간으로 근로시간을 줄이고 최저임금제로 근로조건을 높이고 선진국 체제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노동집약의 제조업'으로 한국이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제 한국의 경쟁력은 전 세계와 맞닿아 있는 온라인에 있다. 그나마 반으로 쪼개져 있는 한국의 '경제영토' 확장의 답은 온라인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제조업의 중요성도 크지만 금융 서비스업의 부상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은 십수 년 전부터 금융의 중심지로 도약하겠다며 '금융허브' 구상을 펼쳐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규제로 다 막아놓고는 허브가 되겠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디지털 세계에서 제2의 금융허브가 될 기회가 왔다. 가상자산이라는 기존에는 없던 시장이 열렸다. 그 중심에 '경쟁력 있는 한국 기업'들이 있다. 특히 한국은 '똑똑한 투자자'들로 무장돼 있다. 올해 2월 말 기준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는 1629만 명으로 전체 인구(약 5100만 명)의 32%에 달한다. 이 정도의 '디지털 리터러시'(디지털 문해력, Digital Literacy)를 갖춘 나라는 드물다. 해외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군침을 흘리는 이유도 바로 활성화된 투자자 시장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구한말 조선처럼 문을 걸어놓고 있다. 미래 먹거리가 없고, 일자리도 없다며 한탄하지만 정작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상자산 분야는 계속 외면한다.
"가상자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누가 그것을 통제하느냐다." 이번 파리 행사장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카르다노 창립자인 찰스 호스킨슨이 밝힌 말이다. 한때는 세계 1위였던 한국이 더 이상 통제권을 잃지 않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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