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머니 풀고, 치매머니 막고"…초고령화 일본의 '돈맥경화' 대응법
[초고령화는 신산업이다]① 손주 사랑에 열린 지갑…교육신탁만 20조원
치매 오기 전 '후견인 신탁' 준비도…"초고령화, 금융업 성장의 기회"
- 김근욱 기자
(도쿄=뉴스1) 김근욱 기자 = 일본의 한 치매 고령자가 생활고에 시달려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했다. 그런데 은행에 1110만 엔(약 1억 1100만 원)을 저축해 둔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됐다고 한다.
누군가는 웃고 넘길 해프닝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일본 사회가 직면한 초고령화의 그림자, 그로 인한 경제 문제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장롱머니', 일본에선 '단스요킨'(タンス預金·잠자는 예금)이라 불린다. 다이이치 생명경제연구소는 일본에서 집 안에 쌓아두고 사용하지 않는 장롱머니 규모를 60조 엔(약 522조 원)으로 추산한다.
또 다른 문제는 '치매머니'다. 고령자가 치매를 진단받을 경우 인출이나 처분이 어려워 사실상 '동결' 상태에 빠진다. 일본 미쓰이스미토모 신탁은행에 따르면 오는 2030년 치매머니가 317조 엔(약 3170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본다.
문제는 고령자의 자산이 시장에 풀리지 않는다면, 시중의 돈이 가계 소비나 기업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이른바 '돈맥경화' 현상이 심각해진다. 초고령화 사회의 '선배' 일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까. 현지 금융권 전문가들을 만나 해법을 물었다.
이달 3일 일본 도쿄 일본신탁협회에서 만난 와카바야시 아키히로 총무부장은 부(富)의 이전을 유도하는 상품으로 '교육자금 증여신탁'을 소개했다. 고령자가 자녀 또는 손주의 교육자금 목적으로 신탁은행에 돈을 맡기면 학교 관련 지출은 1500만엔(약 1억 5000만 원)까지, 학교 외 학원비는 500만 엔(약 5000만 원)까지 증여세 비과세 혜택이 주어진다.
와카바야시 총무부장은 "고령자가 자녀에게 직접 증여할 경우에도 비과세 혜택은 있지만, 신탁 상품을 활용하면 비과세 한도가 훨씬 크다"며 "고령자 자산을 시장에 풀기 위한 정부 정책의 일환이다"고 설명했다.
교육비뿐만 아니라, 자녀나 손주의 결혼·임신·출산·양육을 목적으로 신탁은행에 자금을 맡긴 경우에도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최대 1000만 엔(약 1억 원)까지 증여세가 면제된다. 결혼 자금에 대해서는 300만 엔(약 3000만 원) 한도로 비과세가 적용된다.
일본은 매년 10월 셋째 주 일요일을 '손자의 날'로 정해둘 만큼 손주 사랑이 각별한 나라다. 정부도 이러한 가족 문화를 기반으로, 교육에서 출산·양육에 이르기까지 생애주기별로 자산 이전을 유도하는 정책과 세제 혜택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신탁협회에 따르면 교육자금 증여신탁은 2020년 3월 말 기준, 누적 계약 건수 23만 11건, 수탁 잔액 1조 6701억 엔이었다. 2024년에는 26만 8182건, 2조 414억 엔(약 20조 4140억 원)까지 늘었다.
고령자의 자산이 '치매 머니'로 묶이는 상황을 막기 위한 대응법은 '임의후견제도'다. 쉽게 말해, 믿을 만한 사람을 후견인으로 정해두는 방식이다.
핵심은 치매 진단 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법정후견제는 후견인을 법원이 지정하지만, 임의후견제는 본인이 신뢰하는 사람을 직접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신탁은행을 활용한 '임의후견제도 지원신탁'은 자산이 후견인의 마음대로 쓰이지 않도록 금융기관이 금전 사용을 통제·관리하는 개념이다. 일본신탁협회에 따르면 후견제도 지원신탁 수탁 건수는 2023년 3월 말 기준 1만 5500건, 수탁 잔액은 5099억 엔(약 5조 990억 원)으로 파악됐다.
이달 1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다미구치 요시미쓰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 인생100년 응원부 이사는 한 가지를 통계를 제시했다. 도쿄 건강장수의료센터가 조사한 치매발병률에 따르면 △80~84세 여성은 16.6% △85~89세 33.3% △90~94세 52.2% △95세 이상은 73.0%로 나타났다.
즉, 85세를 넘기면 3명 중 1명은 치매가 발생하는 셈이다. 다미구치 이사는 "반드시 치매에 걸린다는 뜻은 아니지만,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며 "고령자들이 건강할 때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할지에 대한 사전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출산·고령화가 우리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동공급 감소 △경제성장률 하락 △ 복지지출 증가 △투자자의 위험회피 등을 우려한다.
다만 서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처럼 신탁 상품을 활용해 '부(富)의 세대 간 이전'을 촉진한다면 금융산업은 고령화를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그는 "일본의 교육자금 증여신탁이 2013년 도입됐는데, 큰 폭의 증여세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부의 세대 간 이전과 함께 소비 촉진 효과도 상당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아직 신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이러한 서비스가 당장 금융회사의 수익으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며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탁업법 제정 등 제도적 틀을 정비하고, 적극적인 홍보와 세제 지원을 통해 신탁 시장을 조속히 활성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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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저출산과 고령화는 '정해진 미래'다. 이미 시작된 '인구의 계절'은 되돌릴 수 없다. 이 흐름은 한국을 '1% 저성장'이라는 그늘로 데려왔다. 하지만 시선을 바꾸는 순간, 위기는 기회가 된다. 2007년 세계 최초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 일본 기업들은 고령자를 소비자이자 '시장의 중심'으로 바라보고 새 판을 짰다. 이제 같은 길목에 선 한국에게 일본은 가장 중요한 참고서다. 초고령화를 신산업의 기회로 삼아야 노인도 살고, 국가도 산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