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내가 알던 삼성과 지금의 삼성
(서울=뉴스1) 서명훈 산업1부 부국장 = "예전엔 우리가 나라를 걱정했는데 지금은 전 국민이 우리를 걱정하는 신세다"
요즘 삼성 관계자들을 만날 때 자주 듣는 얘기다. 삼성전자가 그 중심에 있지만 다른 계열사 관계자들 역시 '위기'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
처음에는 엄살이라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삼성은 8년 전에 멈춰 있었던 탓이다. 삼성을 취재하던 기자에서 데스크로 역할이 조금 달라졌다. 2017년 당시 삼성전자는 영업이익이 53조 6000억 원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2018년에는 59조 원으로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이 늦어져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곧 되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삼성전자가 늦었다기보다는 SK하이닉스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시 마주한 삼성은 예전에 내가 알던 삼성과는 많이 달랐다. 길어야 1년 정도면 충분히 따라잡을 것으로 생각했던 HBM은 여전히 개발 중이다. 기술적으로 아무리 어려운 분야라 해도 1년 이상 뒤처지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지난 3월, 영남 지역을 휩쓴 산불 대응에서도 삼성의 모습은 낯설었다. 산불로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기업들이 앞다퉈 구호 물품을 보내고 성금을 기탁했다. 금융권이 3월23일 먼저 성금을 내놨고 신세계와 HD현대 등이 25일, 현대자동차그룹과 두산그룹, LG그룹, 포스코그룹, SK그룹 등이 26일 오전에 발표했다. 삼성은 이날 오후 3시가 넘어서야 30억 원의 성금을 발표했다.
이런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나섰던 곳은 삼성이었다. 삼성이 내는 성금 규모를 보고 다른 그룹들은 형편에 따라 삼성의 절반이나 3분의 1 정도를 기탁했다. 삼성의 성금 규모가 다른 그룹의 2배로 불문율처럼 자리 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기업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들의 형편에 맞게 성금 규모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난 8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현직 삼성맨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변화는 'No'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다. 최고경영자(CEO)가, 혹은 상사가 내린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결론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떠나 말할 기회조차 없는 조직에서 일하고 싶은 인재는 없다.
또한 어렵게 영입한 인재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한 퇴직 임원은 "경영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핵심 인재가 회사를 떠나면 (이건희)회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며 "인재 영입과 유지가 CEO 평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거나 '창의성보다는 근면·성실함만 요구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미 삼성 내부에서 조직 진단이 한창 진행되고 있으니 어쩌면 다 알고 있는 문제점일 수도 있다.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미래전략실' 부활부터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을 걱정하는 국민 한 사람으로서, 이 목소리가 작게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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