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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4시간의 가치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미군만 보면 북한은 전쟁을 멈출 것이다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고수한다는 전제하에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해서 서울을 탈환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애초에 북한군의 규모와 전력을 과소평가한 작전이었다. 맥아더가 구상한 병력은 미1기병사단과 해병연대였다. 미군이 자랑하는 최정예 부대였지만, 북한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전력이었다.

애치슨 선언을 이유로 한국전쟁을 미국이 유인했다는 음모론이 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아는 사람이 적은 나라였다. 미국의 세계경영은 초보 수준이었고, 정보 능력도 형편없었다. 정보전에 어마어마한 기술과 인력이 투입되는 지금,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잠꼬대까지 잡아내는 기술력이 있다고 해도 정보전의 진짜 능력은 분석력이다.

정보분석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온갖 정보와 역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을 찾아 구상하는 능력과 그 사회의 문화와 인간행동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분석력이다. 전자도 어렵고 후자는 요원했다. 21세기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그 사회와 문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능력은 몇 명의 연구자들이 탁상에서 세미나 하는 수준이었다.

1950년대에 미국의 소련이나 중국에 대한 이해도 인문학적 수준을 거론할 수 있을 수준인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의 지식인 중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가는 몇 명이나 될까.

북한의 오판은 미군이 개입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신속하게 개입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일본에 주둔 중인 미군의 병력과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장교와 부사관 중에는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많았다. 전후에 미군은 대대적인 인력감축을 시행했다. 살아남은 장교는 전투 경험과 공적이 현저한 장교들이었다. 반면 생존한 병사들은 다 제대했고, 전시의 긴장이 완전히 빠진 신병들이 입대했다. 이들에게 일본은 최고의 근무지였다. 일본이라고 하면 게이샤의 나라인 것 같은 환상이 있었고, 전후에 패전한 일본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미군은 기동훈련을 자제했다. 주일미군은 군기가 완전히 빠졌다.

1948년 월튼 워커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미군을 전투 준비 상태로 되돌려 놓으라는 맥아더의 명령을 받았다. 워커는 향락에 빠진 지휘관을 교체하고 기동훈련을 시행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대급 기동훈련밖에 하지 못했고, 많지도 않은 부대들(주일 미군은 모두 4개 사단이었다)은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훈련 효율이 높지 못했다.

훈련이 부족하면 병사들의 체력이나 전투기술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단 전체의 전쟁준비 상태가 떨어진다. 우선 병력부터 연대와 대대 병력은 모두 기준치 미달이었다. 24사단의 경우 1개 연대마다 2개 대대밖에 없었다. 장비나 탄약도 적고 상태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트럭 같은 수송 수단도 극도로 부족했다.

갑작스런 동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신속하게 파병을 결정했고, 미8군은 신속한 투입을 결정했다. 국군이 너무 빨리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파병은 경찰행동이다", "북한군은 미군을 보기만 해도 전쟁을 멈출 것이다" 미군은 이런 정신상태로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많은 병사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고, 소대장, 중대장들로부터 들었다.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전투준비 상태가 엉망인 군대를 전장에 투입하려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장병사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군 수뇌부가 임박한 전쟁을 대비하지 못했고, 북한군의 전차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를 놀라게 했던 T-34라는 사실도 몰랐을 정도로 북한군 전력에 대해 어두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휘부가 사태를 이 정도로 만만하게 보지는 않았다.

미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한국전쟁 파병을 남의 나라 전쟁에 쓸데없이 개입해서 애꿎은 젊은이들만 희생시켰다는 견해가 있다. 이런 입장의 역사가들은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행동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1950년 7월 초 미군의 파병을 두고도 준비 안 된 군대를 전선에 투입하는 건 범죄행위라고 비판한다. 이런 견해를 한국의 지식인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서 되뇌는 것도 한심하다. 북한군을 만만하게 보았기에 준비 안 된 군대를 성급하게 투입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심각하게 보았기에 준비 안 된 군대라도 서둘러 파병했던 것이다.

주일 미군 4개 사단 중에서 1차로 파견할 부대로 규슈에 있던 24사단이 간택을 받았다. 하필 이 사단은 주일 미군 중에서 최하 전력의 부대였다. 하지만 한국 상황이 급박해서 기준이 준비상태가 아니라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부대였다. 사단장 딘 소장이 미군정 시절에 한국에서 잠시 근무한 이력이 있는 것도 참작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단은 고사하고 연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킬 수송 수단도 부족했다. 딘 소장은 구마모토에 주둔 중이던 21연대의 일부 병력이라도 수송기를 이용해서 우선 투입하기로 한다. 당시 항공수송 능력은 대대급 병력이 최대치였다.

연대나 대대 병력도 한 곳에 주둔하지 않고 있었기에 찰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21연대 1대대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 부대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라고 불리는 이유가 이렇게 급조한 혼성부대였기 때문이다.

병력은 406명, 장비는 1인당 탄약 120발, 이틀분 식량, 무반동포 2정, 4.2인치 박격포 2문, 60㎜박격포 4문이었다. 화력은 중대규모 수준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페리 중령이 지휘하는 52포병대대 134명을 합류시켰다. 무장은 105㎜포 6문에 포탄 1200발이었다. 그런데 전차를 공격할 철갑탄은 6발뿐이었다.

죽미령 전투

7월 3일에 부산도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5일 새벽에 오산 죽미령에 포진했다. 이곳에는 현재 전투 기념관과 비가 서 있다. 24사단 34연대는 4일에 부산에 도착해서 하루 일정 차이로 스미스 부대 뒤를 따랐다.

딘 소장이 구상한 방어선은 평택-안성 라인이었다. 이곳은 한반도에서 좌우 폭이 제일 좁은 곳이다. 다만 방어하기에는 지형이 별로 유리하지 않다. 딘 소장은 지형적 기준으로 봐서는 금강이나 소백산맥, 낙동강도 고려해 보았지만, 북한군을 최대한 북쪽에서 막아야 한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보았다.

스미스 중령은 과달카날 전투에 참전한 이력이 있는 유능한 장교였다. 어두워서 주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들었지만, 죽미령 도로 양쪽으로 부대를 배치하고 동쪽에 있는 철로를 내려다 보는 지역으로도 병력을 배치했다. 본부가 위치한 능선은 도로를 따라 평행으로 뻗어있어서 감제 효과가 좋았다.

아침이 되자마자 북한군 전차가 출현했다. 전차를 지원하는 보병이 없었다. 울리 코너 중위가 전차 뒤쪽 14미터까지 접근해 바주카포를 무려 22발이나 발사했다. 그러나 전차는 끄떡하지 않았다.

전차는 바주카는 신경도 쓰지 않고 후방에 위치한 포병대로 향했다. 33대의 전차가 줄을 이어 등장하자 병사들이 도주했다. 대대장 페리 중령이 장교와 부사관을 데리고 포를 조작해서 간신히 2대를 격파하고, 남은 병력을 추스렸다. 희한하게도 전차는 포병대도 무시하고 오산 시내로 직전했다. 전차는 이들이 미군인지 몰랐다는 추측도 있다.

덕분에 포병대는 무사했지만 스미스 부대와 통신이 끊어져 버렸다. 스미스 부대는 포병대가 전차에 유린되었다고 생각했고, 이제 포병 지원 없이 북한군을 막아야 했다. 암울한 상황에서 스미스 중령은 자신의 임무는 뒤에 있는 24사단 병력이 전투 준비를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다. 북한군에 포위되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북한군 보병이 다가왔다. 포격과 전차로 미군을 제압하고, 보병이 좌우로 전개해서 포위를 시도했다. 죽미령 서쪽에 있던 B중대가져 도로 동쪽으로 합류했다. 북한군은 서쪽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동쪽 진지를 제압하면서 다른 부대를 동쪽 측면으로 접근시켰다.

삼면으로 포위망이 완성되고 북한군이 총공세를 취하려고 하자 스미스 중령은 탄약도 바닥났고, 마지막 남은 후퇴로가 끊기기 전에 부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한다. 이때까지 걸린 시간은 4시간이었다.

부대 수준에 비하면 이만큼 버틴 것도 대단한 편이었다. 철수 명령을 내리자 일부는 철모도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 북한군 손실은 42명 전사. 85명 부상이었다. 스미스 부대는 사상과 포로 합쳐서 180명이었다. 한번 전투로 33%의 손실을 입었다.

이 4시간이 가치 있는 시간이었을까? 지금 판단해 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충분한 전력이 도착하려면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부족한 시간에 적은 병력으로 적을 저지하려면 최대한 빨리 접촉해서 지연작전을 펼치는 것도 옳은 방법이다. 밀어닥치는 압력의 크기와 지연시킬 수 있는 시간에 대해서는 오판이 있었지만, 180명의 희생으로 얻은 4시간이 누적되어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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