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로도스 공방전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하얀 플레이트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적을 향해 긴 창을 잡고 질주하는 중세 유럽의 기사는 세상에서는 낭만이고 역사가에게는 악몽이다. 일단 역사학도들은 중세 기사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가 거짓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기사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기사들은 고상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았다. 그들 대부분 성급하고, 호주머니 사정이 쪼들렸으며, 술주정꾼이었다.
강하지도 않았다. 싸움은 좋아하고 즐겼지만, 전술 이해 능력은 형편없었다. 기사들이 출진한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들은 무모한 돌진을 일삼다가 스스로 사지로 뛰어들기 일쑤였다. 체력이 고갈되거나 함정에 빠진 기사는 경무장한 이교도나 심지어 농민 출신 보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사로잡혔다.
투철한 신앙심이란 수호신과 부적에 기대는 원초적인 종교성에 불과했다. 일상에서 윤리적 제약은 아주 싫어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신앙심은 이교도를 죽이거나 그들의 재산을 약탈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불타올랐다.
이런 이야기에 충격을 받으면 역사가란 그런 감상적이고 폭력적인 사고, 서구 편향의 인종적인 편견을 떨쳐버린 고귀한 지성인이 되는 작업이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감성과 작별하고 이성적인 지식인으로 한참 동안 수련을 받고 나면, 그 고귀한 이성과 지식이 단단하게 뭉쳐 호수 밑바닥이나 동굴 속에 뒹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비뚤어진 종교심, 종교의 오용, 뒤틀린 사고와 편향된 감정과 결별한 역사, 그런 일들이 왜 발생하고, 사람들이 왜 그런 것을 좋아하고, 매료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가 진실된 역사일까.
기사에 대한 환상과 오해는 정치가, 기업가, 상인, 종교인, 지식인, 노동자에게까지 모든 직업군에 다 적용이 가능하다. 기사에 관한 지적을 다시 풀어보면 그런 기사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기사도 있었다. 어떤 기사도 완전한 기사는 되지 못했지만, 완전한 기사를 표상으로 하는 사람은 많았다. 다만 모든 직업군이 그렇듯이 뭔가 정신적인 가치가 과도하게 치솟고, 극단적으로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사람이 등장할 때는 그들의 역사적 기능이 쇠퇴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석양의 기사, 기사의 종언시대에 극적인 전설을 남기며 사라져간 기사단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의외로 길고 오욕과 감동이 뒤엉켜 있다.
기사의 이미지가 극적으로 개화하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끝없이 재현되는 데는 십자군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십자군 왕국은 봉건국가의 연합이었고, 군대는 유럽에서 자원봉사를 서약하고 오는 기사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사단이란 조직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호전성, 탐욕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만, 여러 기사단 중에서도 명성이 제일 괜찮았던 기사단이 구호기사단이라고 불렸던 성 요한 기사단이었다.
검은 제복에 하얀 십자가를 그린 요한 기사단은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다스베이더 같은 섬뜩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전투보다는 평화를 사랑했고 병자와 부상자는 종교를 가리지 않고 구호했다. 그러다 보니 호전성과 무력에서는 상당한 손해를 보았을 것 같은데, 과거 기사들의 전에서도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키는 전사의 무력이 아니라 팀워크였다. 전술과 통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사들은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들다가 매복에 걸리거나 스스로 사지로 돌입해서 이겼던 전투도 패망으로 이끄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구호기사단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차분함과 강한 규율, 복종심을 요구하는 조직이었다. 그들도 간간이 전투에 참여했지만, 다른 기사단에 비해서는 냉정함과 통제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악명이 적으니 전투에서 위명을 떨친 적도 적었다. 이들이 최고의 명성을 얻은 때는 십자군 왕국의 요새들이 거의 함락되고, 십자군의 흔적이 지워지던 시기였다.
요한 기사단의 본거지는 시리아에 위치한 크라크 데 슈발리에였다. 이 성은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최고의 요새라는 평을 듣지만, 최고여서 생존했다기보다는 생존했기에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다는 편이 옳다.
전성기에 대부분의 십자군 요새는 강고했다. 기사들의 수는 의외로 적어서 1개 요새에 수십 명, 심한 경우는 수 명의 기사만이 배치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들도 꽤 잘 버텼다.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고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이상적인 요새를 배출하던 곳이었다. 훌륭한 요새는 대부분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했다. 성벽에 오르기보다 성벽까지 비탈을 오르기가 더 힘들었다.
비탈을 올라도 공성구를 배치하거나 병력을 밀집시킬 공간이 없었다. 고대에 이곳에서 명멸했던 왕국들은 수도나 대도시를 지켜야 했다. 이중 삼중의 요새와 빽빽하게 탑을 배치했지만, 도시를 지켜야 하다 보니 성은 넓어지고, 성 주변에 평원이 펼쳐졌다. 하지만 수도 적은 십자군은 대도시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난공불락의 지형을 찾아 좁고, 강하고, 이중삼중의 방어 구조를 지닌 진정한 요새를 세웠다. 이런 요새는 대부분 시야가 트여 주변 일대를 완전하게 감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이 분열을 극복하고, 전력이 강화되자 전설의 요새들이 하나둘씩 함락되기 시작한다. 이 선두에 섰던 집단이 모술과 다마스쿠스를 차지한 장기 왕조의 군주들과 그의 후계자인 살라딘이었다.
마침내 살라딘은 1187년에 예루살렘까지 탈환하지만, 요한 기사단은 장기 살라딘의 공세까지 모두 물리쳤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게 함락된 때는 근 100년이 지난 1271년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요한 기사단은 성의 방어에는 성공했다. 성을 공격하던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 1세는 맹공을 펼쳐 외성을 함락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것만 해도 전에 없는 전과였다. 그러나 내성은 온전했고, 내성은 외성보다 더 단단했다.
바이바르스 1세는 교황의 항복명령서를 위조해서 기사단을 보호한다는 조건 하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요한 기사단은 이 가짜 편지에 속아 성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만극은 양자 합의 하에 일어난 일이고, 요한 기사단도 이번 공세는 막아냈지만, 유럽에서 지원도, 이제는 더 이상 시리아에서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알면서도 속는 척하고 성문을 열었다는 설도 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떠난 후 기사단은 방랑하면서도 유럽에서 진행되는 십자군 원정에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14세기로 접어들자 오스만 세력이 동로마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압박하고 있었고, 유럽은 십자군은 고사하고 동로마제국의 운명에도 관심을 잃어갔다.
한편 기사단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교황청이나 국가와의 연계도 느슨해진, 독자적인 결속력을 가진 집단이 됐다. 그런 변신의 결과로 1310년 그들은 사라센 세력이 아닌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해서 자신의 거점으로 삼는다. 그곳이 현재 튀르키예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로도스 섬이었다.
로도스는 비경을 간직한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나 이 섬의 진정한 가치는 유럽과 중동을 연결하는 레반트 항로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가치였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로도스 섬의 항구에 설치했다는 30미터에 달하는 청동상이었다. 이 청동상은 존재했던 건 확실한데 크기에 대해서는 당시 기술로 그런 높이가 불가능하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네로 황제가 콜로세움 앞에 세웠던 자신의 청동상도 그 정도 높이였던 걸 보면 아마도 고대 세계의 기술이 허용하는 최대치의 동상이 아니었나 싶다.
로도스 거상의 진정한 불가사의는 제주도보다 작은 이 섬에 로마 제국의 황제와 맞먹는 규모의 동상을 세울 수 있었던 재력 또는 경제적 가치이다. 그만큼 레반트 항로는 엄청난 부를 실어 나르는 항로였고, 로도스는 그 부를 흔들만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로도스를 근거지로 요한 기사단은 이슬람 상선들을 엄청나게 약탈했다. 기사단이 해적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약탈전쟁에 관한 생각은 기독교 세계나 이슬람 세계를 떠나서 육지의 법과 윤리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한 무언가가 있었다. 양측 다 해적사업은 번창했고, 고국에서는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기사단의 구성은 이원화되어 있었다. 기사는 여전히 소수였고, 엄격한 심사와 규정이 있어서 기사로 승격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는 전 유럽에서 능력이 뛰어나거나 욕심이 차고 넘치거나 해적질이 소원인 무뢰한들을 모아서 구성했다.
로도스 기사단은 무려 15세기 말까지도 버텼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던 오스만의 영웅 메메드 2세가 이 기독교 악당을 제거하기 위해 출전했다. 1480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파괴했던 우르반 대포 수준의 포를 16문이나 제작했다.(1453년에는 겨우 1대였다).
지금도 로도스에 남아 있는 기사단의 요새는 이 대포의 공격과 오스만군의 무차별한 공세를 100 대 1의 전력 차를 극복하며 이겨냈다. 당시 기사단은 유럽에서는 이미 한물간 낭만적인 기사들과는 달리 완전히 전문화된 프로페셔널한 군사집단이었다. 탐욕과 왜곡된 신앙심과는 별개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능력검증이 철저했다. 기사단장은 엄청난 존경을 받았고, 조직에 대한 신뢰와 복종심도 철저했다. 전투대형, 이들은 열과 성을 다해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것은 기사의 미덕이 아니라 군대의 미덕이었다. 이것이 로도스 전투의 진정한 교훈이다.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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