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의 먹거리 이야기] '전복과 바나나'
- 길혜성 기자

(서울=뉴스1) 길혜성 기자 = 바나나가 엄청난 고급 과일이었던 때가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입원하여 병문안을 가면 병실 한편에는 노란 바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병실 방문의 단골 메뉴는 전복죽이었다. 환자용 식사가 부실해서인지 평소 아껴두던 보온병에 정성을 담은 뜨거운 죽을 전달했다. 전복도 당시에는 바나나처럼 평소에는 맛볼 수 없는 특식이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에 톡톡 씹히는 전복의 맛은 몸이 아픈 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됐다.
몸 대신 마음의 휴식이 필요했던 지난 2008년, 많은 사람은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그때 숙소 주변에는 오분자기 뚝배기집이 많았다. 한 그릇 8000원에 작은 오분자기와 딱새우에 가끔 씹히는 호박으로 속을 채웠다.
가게 주인분은 그냥 작은 전복이라고했지만 오분자기는 전복과는 다른 외관을 가졌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나던 오분자기는 자취를 감추고 양식 전복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 5시간 정도 걷다 보면 마음속 걱정은 사라지고 배가 고파진다. 바닷가를 지나면 물회로 끼니를 해결했다. 자리돔이나 한치물회가 흔했고 전복물회도 좋았다. 시원한 물회에 딸려 나온 약간 미지근한 공기밥을 함께 먹고 나면 다시 걸어갈 기운이 생겼다.
사람들이 올레길을 걸으면서 경험했다는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바다와 산을 오르락거리며 걷는 일상이 준 에너지는 멈췄던 인생의 바퀴를 기꺼이 다시 돌리게 만들어 주었다.
올레를 마치고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당시 내가 일했던 곳에서는 전복을 다듬어 한 번에 오븐에 쪄서 차게 식혀 준비했다. 전복 내장은 올리브오일, 통마늘, 로즈마리로 천천히 익혔다. 내장과 오일을 모두 믹서에 갈아서 전복구이에 소스로 곁들였다.
오마카세 코스 중 하나로 들어갔던 전복은 고급 재료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가 전복 양식이 많아지면서 점점 가격은 안정됐다. 전복죽, 전복돌솥밥, 전복장 등 메뉴도 다양해졌다.
엊그제 방문했던 마트에선 전복 4개에 5000원 정도로 구입할 수 있었다. 개당 2000원 안 되니 요즘 물가에 놀랄만한 가격이다. 20년 전 자연산 전복은 개당 1만 5000원 정도였으니, 바나나 가격의 하락과 비슷하다.
흔하다고 전복 자체의 가치가 내려가진 않는다. 든든한 단백질을 선사하는 전복은 가격을 떠나 포만감을 주는 해물이다. 내장에 약간의 카레 가루를 더하면 좀 더 맛이 난다.
쌀을 볶아 뚝배기에 밥을 지었다. 물량을 조절하느라 15분 정도를 가스 불 앞에서 지켜 섰다. 밥이 뜸이 들 무렵 썰어놓은 전복살을 후루룩 섞어주고 고소한 누룽지 향이 날 즈음 불을 껐다. 전복 2개면 멋진 1인 식사가 가능하니 싱싱한 전복을 장바구니에 올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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