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티카지노

[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제2차 로도스 공방전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2차 로도스의 공방전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존경받던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은 로도스로 이전한 뒤로 반 해적집단이 됐다. 참 애매하기는 하지만 기사단장과 기사단은 신앙심이 깊고, 명예를 존중하고, 엄한 규율을 유지하는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신앙심과 명예란 현대적인 인도주의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현대인들은 적의 용사를 칭찬하고, 상대의 명예를 존중해 주는 기사들이 해안 도시를 불사르고, 노예로 팔 수 없을 경우에 이교도 선원들을 때로는 같은 신앙인마저도 인정사정없이 바다에 던지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영위했다는 술레이만 2세는 세계 유일의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서 헝가리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넘봤다. 그러나 육상 정복은 심대한 곤경에 처했는데, 당시의 수송 수단으로서는 그 먼 원정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좌절을 겪은 술레이만 2세는 눈을 바다로 돌렸다. 이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무역 대행인 역할을 하던 베네치아의 거점들, 키프로스와 그리스의 주요 섬, 항구를 공격해서 빼앗기 시작했다. 이런 바다로의 야망이 그의 사후에 레판토 해전을 야기하게 된다.

그런데 오스만 함대의 출정로, 그것도 먼바다도 아니고, 튀르키예의 해안에 바짝 붙은 섬에 귀신 같은 해적단이 버티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들은 로도스의 악마들을 지옥의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로도스 기사단(해적단)은 기사뿐 아니라 그 아래 중간 장교와 병사들도 전 유럽을 돌며 엄격한 심사로 모은 전사들이어서 전투에서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약탈하고 습격할 때는 막돼먹은 해전단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들이 조직적으로 싸울 때는 엄한 기강과 규율이 잡혀 있었다. 이것이 일반 해적과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술레이만은 그들을 결코 만만히 보지 않았다. 1522년 6월 술레이만은 300척(700척이라는 설도 있다)의 대함대를 로도스로 파견했다. 이 함대는 한 번에 1만의 병력과 전쟁의 양상을 바꾼 신무기 대형 대포를 실어 날랐다. 섬과의 거리는 겨우 20km, 육안으로 빤히 보이는 마르마르스 항구에는 술레이만 2세와 함께 수십만의 대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술레이만의 직접 인솔한 병력만 10만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로도스 요새의 병력은 기사 650명, 병사와 선원이 약 7천명이었다.

술레이만 2세는 돌로 만든 포탄 지름만 1m는 되는 거대한 대형 대포로 화력 시범을 보였다. 그러나 로도스에 세운 요새는 볼품은 시리아에 남겨두고 온 과거의 성채(크라크 데 슈발리에)보다 못했지만, 더 강력하고 효율적인 성채였다. 거대한 대포도 성벽을 파괴하지 못했다. 기사단은 국적이 아니라 사용 언어에 따라 조직을 구성했는데, 7개의 대대가 있었다. 프로방스, 오베르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영어, 독일어 대대는 각기 보루 하나씩을 맡았다. 이것은 다국적군인 기사단의 사정상, 어쩔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서로 간에 경쟁심을 유발하는 효과도 있었다.

술레이만 2세는 기사단의 구성과 노림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의 지역 영주라고 할 수 있는 파샤들에게 구획을 나누어 맡김으로써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공격과 수비대가 모두 대포와 총을 사용하게 되면서 요새 공략법도 바뀌었다. 수비대는 성벽과 탑에 포대를 설치하면 됐지만, 공격하는 쪽에서는 적의 포화 아래 성벽을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근접해서 포대를 설치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커다란 참호를 파면서 성으로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이 공격호는 수비 측이 발사한 포탄의 살상 범위를 줄이기 위해 지그재그로 파면서 앞으로 나갔으며, 중간중간에 대피호와 포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과 자리를 마련했다.

이런 포격전은 아무래도 공격 측의 노력이 더 들어가고 희생도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시대, 어떤 무기를 동원해도 공성전에서 공수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건 각오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희생비는 크겠지만, 그래서 10만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하지 않았는가? 대포의 크기와 수도 오스만군이 월등했다.

창과 화승총

희생은 각오했지만, 오스만군이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포격의 정확성이었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마르티네고라는 크레타 출신의 성벽 건설자이며 포격 전문가가 자원해서 로도스에 왔다. 그는 공성전과 수성전, 포격술에 관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다. 성벽의 유리함에 마르티네스의 포격술이 더해지면서 오스만군의 공성로 공사는 큰 피해를 보았다. 마르티네스는 저격 수준으로 포탄을 발사해 오스만군의 대포와 표병대장, 화승총 지휘관들을 살해했다.

성벽을 공격하는 또 하나의 그리고 전형적인 방법은 성벽 아래로 토굴을 파는 방법이었다. 이것도 대단한 토목공사인데, 터널은 성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를 여는 경우도 있고, 성벽 아래에서 화약을 폭발시켜 성벽을 무너트리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워낙 고전적이어서 파훼법도 정해져 있었다. 상대가 상당한 토목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성벽 아래 땅으로 깊게 파고들어 오면 맞굴을 파서 터널 내부로 진입하거나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 방법을 사용하려면 터널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터널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은 동서양이 똑같은데 굴착공사의 소음과 진동을 잡아내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항아리를 묻고, 대나무 장대를 꽂아 진동을 찾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때 시각장애인들을 동원했는데, 대체로 이들이 청각이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하기 때문이었다.

로도스에서는 항아리 대신 성벽을 따라 북을 묻고 북위에 완두콩을 올려놓았다. 완두콩이 뛰면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징조였다. 기사단은 즉시 그 위치에 아래로 굴을 파고, 그리스의 불에 사용하던 나프타 가스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공격 측도 예상했다.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시 물량작전이었다. 오스만군은 50개가 넘는 터널을 팠고 그중 일부는 탐지를 피했다. 북과 완두콩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몇 군데 성벽이 무너졌다. 로도스의 수호가 무너졌다. 오스만군은 성벽이 벌어진 틈으로 총공세를 감행했다.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지만 넓은 출입구를 열어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좁은 성벽의 틈으로 쇄도하면 접전 지역에서는 수의 우위를 발휘할 수 없다. 다만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이면 병력이 적은 수비 측에서는 체력에서 밀리게 된다.

오스만군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아니 상관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령에 순응하는 병사로 유명했다. 특히 술레이만의 군대는 유럽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군기를 자랑했다. 이들의 놀라운 복종심을 본 유럽에서 온 관찰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세계 최고의 군대, 최강의 군대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쇄도하는 오스만군에 로도스 장병들은 창과 총, 그리고 팀워크로 맞섰다. 당시 화승총은 50m 이내 거리에서는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도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문제는 당시 화승총은 재장전에 40초 이상은 시간이 걸린다. 50m 거리면 총에 맞아 쓰러진 오스만군 병사의 뒷줄 병사가 달려들 때, 재장전할 틈이 없었다.

기사단은 이 약점을 창병과 총병의 협력전술로 상쇄했다. 총병이 사격하고 뒤로 물러서면 크고 길고 강력한 창을 든 창병이 앞으로 전진해 적을 막는다. 또 궁병이 있어서 활이나 석궁 같은 발사 무기도 거들었던 것 같다.

창병이 힘으로 막는 동안 총병은 재장전을 하고 앞으로 나와 초근거리에서 적을 사살한다. 이런 로테이션 전법은 체력 절약에도 도움이 됐다. 다만 전투에서 체력 대결은 근육과 물리적 법칙 못지않게 흥분과 긴장도도 크게 작용한다. 단 한 번의 접전으로도 탈진 상태로 빠지는 병사들도 있다. 반면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병사들은 수십 배의 체력을 발휘한다.

비 내리는 날

술레이만 2세는 10일, 길어야 한 달이면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도록 성벽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사이에 오스만군은 6만 명을 잃었다. 하지만 로도스군도 체력이 다했다. 기사는 180명, 군사는 1500명밖에 남지 않았고, 화약은 마지막 한 번 전투를 벌일 분량밖에 없었다. 가장 실망스러운 일은 유럽의 어떤 국가도 이들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제44대 기사단장인 프랑스인 빌리에 드 릴 야당은 아당은 술레이만 2세가 처음 항복을 요구할 때 내건 조건, 항복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했다. 술레이만 2세는 이들을 학살할 수도 있었지만, 위대한 황제로서 아량을 보이기로 했다. 유럽 정복을 꿈꾸는 그로서는 복수보다는 명성이 중요했다. 그는 기사단장을 위로하고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술레이만 2세가 한 유일한 복수는 기사단장을 처음 알현하던 날 그를 일부러 밖에 오래 세워둔 것이었다. 그날은 비가 계속 내리던 날이었다.

유럽의 군주들은 기사단의 분투를 칭송했지만, 모든 국가에 이들은 귀찮은 존재였다. 기사단은 8년을 떠돌았는데, 오스만의 해상세력이 계속 서진하자 카를 5세는 이들을 서방의 지중해 방어선의 요충인 몰타에 보냈다. 이곳에서 기사단은 다시 한번 오스만군과 역사에 남는 대결을 벌이게 된다.

yhkmyy@hanmail.net

바오슬롯 프리미어카지노 소닉카지노 산타카지노 토르카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