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급소와 알박기

(서울=뉴스1) 김현 사회부장 = 영화 '승부'는 한국 바둑계의 전설인 조훈현·이창호 9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스승과 제자의 치열한 대국은 단순한 승부를 넘어 '승부의 룰'과 '존중', '시대 교체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영화 속에서 스승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긴 뒤, 재기를 위해 도전자의 입장으로 다시 제자와 마주한다. 한 타이틀전의 최종국. 한 치의 물러섬 없는 격전 끝에 끝내기 국면에 접어들자 조훈현은 고심에 빠진다. 이윽고 그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급소란 몹시 아픈 자리다. 당하면 옴짝달싹 못 하고 숨이 넘어가는 그런 자리. 돌이 많아지고 뒤엉키면 급소는 늘어난다. 나의 급소는 곧 상대의 급소."
독백이 끝남과 동시에 조훈현은 검은 돌 하나를 과감히 놓는다. 돌부처라 불린 제자는 움찔하고, 해설자는 "절묘한 승부수"라 평가한다. 제자에게 유리했던 판은 뒤집히고, 스승 조훈현은 승리한다. 승패가 갈린 후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한동안 지속된다. 감독은 그 장면을 통해 말한다. 진정한 승부는 치열하지만, 룰이 있고, 품격과 감동이 있다고.
불금이었던 지난 16일, 법무부는 퇴근 직전 시간에 법무부 감찰관과 대검찰청 감찰부장 인사를 발표했다. 5개월과 6개월간 공석이던 두 요직에 각각 현직 검사가 임명됐다. 임기는 2년이다. 문제는 이번 인사가 새 정부 출범이 불과 20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번 인사는 윤석열 전 대통령과 가까운 박성재 법무부 장관의 복귀 직후 이뤄졌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의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됐다가 지난 달 119일 만에 돌아온 이후 이들 보직의 공모 절차를 신속히 진행했다. '중요한 자리이니 비워둘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자리'의 성격이 핵심으로 보인다. 법무부 감찰관은 검찰총장을 포함한 법무부 전체를 감찰할 수 있고, 대검 감찰부장은 검찰 공무원의 비위 전반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는다. 둘 다 조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직이며, 경우에 따라 장관과 검찰총장조차 제약할 수 있는 자리다.
그래선지 정치권에선 이번 인사가 단순한 인사를 넘어서는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현재까지 정권 교체가 유력한 상황에서 이들 보직이야말로 민주당 등 야권이 칼을 갈고 있는 검찰개혁의 동력을 내부에서부터 만들어낼 수 있는 '급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상대의 급소를 먼저 찌른 인사인 셈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시절 법무부 감찰 담당관이었던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검찰총장 재임 당시 한동수 전 대검 감찰부장과의 갈등을 언급하며, "법무·검찰의 감찰직은 검찰개혁의 축"이라고 말했다. 야권의 입장에선 이들 보직을 통해 검찰개혁을 추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 만큼 이번 인사를 두고 야당에서는 '알박기 시도'라며 강도 높게 반발했다. 김용민 민주당 의원은 "인사 내란"이라고 표현했고, 박 의원은 "검찰개혁을 무산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번 인사의 당위성을 주장할 수는 있다. 비워둘 수 없다는 명분도, 인사의 절차적 정당성도 제시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점과 배경이다.
정권말 '알박기 인사'는 1987년 체제 이후 반복돼 온 논란이다. 특히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정부가 '급소'에 해당하는 자리에 상당한 임기의 인사를 강행했을 때, 해당 인사에 대한 정치적 중립성과 정당성이 의심받아 왔다.
더군다나 윤석열 정부는 정상적인 임기 종료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에 의해 탄핵당한 정권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정부는 임기 종료까지 민주적 정당성을 유지하지만, 헌재에 의해 파면당한 정부는 대통령이 탄핵된 순간부터 민주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 봐야 한다.
파면당한 정권의 장관이 새 정부 출범을 10여일 앞두고 실시한 인사라면, 더욱 엄격한 기준 적용이 필요한 이유다. 그 인사가 조직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인지, 판을 흔들기 위한 '한 수'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하다.
급소는 지켜야 할 자리이자, 동시에 상대가 찌를 수 있는 자리다. 영화 속 조훈현이 급소에 던진 바둑돌은 '시대 교체'의 연속선상에서 나온 절묘한 승부수였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파면당한 정권의 장관에 의해 던져진 바둑돌은 상대를 막기 위한 방해의 수로 인식돼 그 정당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전 정부, 하물며 파면당한 정부가 하는 인사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것은 판을 뒤집기 위한 '알박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교체'를 위한 마지막 디딤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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