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법관 잘못 사과드립니다"…백발의 피고인 울린 재심 재판장의 진심
자작시집 내고 스웨덴 망명 시도…귀국 후 안기부 불법체포
"어느 심급도 피고인 호소 귀기울이지 않아"…과거 판결 사과
- 윤다정 기자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선배 법관들이 피고인의 호소에 단 한 번도 귀 기울여 주지 못한 점, 피고인이 고문과 불법 구금에 의해 자백할 수밖에 없었음을 과감히 인정하지 못했던 용기 없음, 1980년대에 내려진 불법적 계엄이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과감히 선언하지 못했던 소신 없음, 선배 법관들의 그런 잘못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꼿꼿한 자세로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김동현 씨(68)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안경을 치켜올려 눈물을 훔쳤다. 눈물은 소리 없는 흐느낌으로 번졌다. 재판장인 권혁중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차분한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원심 판결을 파기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서울고법 형사4-2부(권혁중 황진구 지영난 부장판사)는 21일 김 씨의 반공법 위반 혐의 재심 사건의 선고기일을 열고 무죄를 선고했다. 1983년 7월 징역 5년 확정판결로부터 무려 42년 만이다.
이날 재판부는 선고에 앞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국가정보원의 전신) 수사관들의 가혹행위와 억울한 옥살이로 마음을 다쳤을 김 씨를 위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권 부장판사는 "40여년이 지난 피고인에 관한 수사 기록, 공판 기록, 누렇게 변한 기록들을 보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며 "더구나 피고인이 미농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적어 나간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를 보며 그 안에 담긴 피고인의 절규와 호소, 좌절과 희망,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또한 "더구나 피고인의 석방을 바라며 탄원을 하고 있던 피고인 어머니의 탄원서마저도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했다"고 말했다.
불법적인 수사 과정에서의 잘못이 법원에서까지도 바로잡히지 않은 데 대한 사과의 말도 이어졌다.
권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아마 안기부에 끌려가 오랫동안 구속되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런 허위 자백은 인권 수호의 최후의 보루인 법원에 가서 충분히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라며 "1심 법원은 물론 2심, 나아가 대법원까지 어느 심급에서도 단 한 번도 피고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이와 같은 불법 계엄이, 그로 인해 피고인과 같이 억울한 옥살이로 인해 청춘을 정말로 어렵게, 억울하게 지내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법관들로서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우리들의 업무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사건은 김 씨가 대학생이던 1982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 얼마 되지 않던 엄혹한 시기였다.
김 씨는 1980년 5월 자작 시집 '7월의 반란'을 인쇄해 배포한 일로 검거될 것을 우려해 망명을 결심하고는 1982년 4월 스웨덴으로 출국, 국제사면위원회 스웨덴지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김 씨는 북한 대사관을 한 차례 방문했는데, 주스웨덴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의 설득으로 망명을 취소했다.
김 씨는 5월 귀국해 김포공항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영장 없이 체포·연행됐고 6월 검찰 송치 전까지 조사를 받았다. 지하실에 40일간 불법 감금된 김 씨는 수사관들로부터 구타 등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씨는 1982년 11월 1심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2심은 김 씨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고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는 2023년 9월 전체회의에서 김 씨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하고 재심 등 조처를 할 것을 권고했다. 서울고법은 재심 사유가 있다고 판단하고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 뒤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구타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돼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며 "재판 과정에서 계속해서 수사 과정의 진술 임의성을 주장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또한 "안기부 수사관에 의해 불법 장기 구금돼 고문, 가혹행위를 당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했다"며 "검사 앞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일이 없다 해도 피고인으로서는 다시 안기부에 불려 가 고문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허위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봤다.
25세의 대학생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김 씨는 이날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일본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나섰다.
김 씨는 선고 직후 "오늘 재판부에서 아주 훌륭한 판결을 해 주셨다"며 "25살에 교도소에 갔고 조금 있으면 70살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서 좋은 판결을 받아 고마울 뿐"이라는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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