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트랄랄레로 트랄랄라"…'뇌썩음' 시대
'뇌가 썩는' 조악한 콘텐츠에 중독된 사회…'이탈리안 브레인롯' 밈의 유행
쇼트폼에 노출된 위험한 아이들…정부 정책은 우왕좌왕,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 이기범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트랄랄레로 트랄랄라"
"퉁 퉁 퉁 퉁 퉁 퉁 퉁 퉁 퉁 사후르"
이탈리아 억양의 정체불명 조어가 귀를 때리고, '불쾌한 골짜기'를 느끼게 하는 엉성한 3D 캐릭터가 눈을 찌른다. 그러나 짧은 시간 단순 반복되는 영상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고 만다. "트랄랄레로…", "퉁퉁퉁퉁…"
이른바 '이탈리안 브레인롯'이라 불리는 최신 유행 밈이다. 나이키 신발을 신은 조악한 상어, 방망이를 든 기괴한 통나무 캐릭터가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통해 만들어진 일종의 캐릭터 놀이다. 여러 캐릭터를 놓고 누가 더 강한지 따지는 'vs놀이' 영상까지 각종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 알고리즘을 장악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왜?' 온 세상이 날 속이는 것만 같은 밈에 의문을 제기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애들'과는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은 '최신 유행'에서 배제된 채 '트랄랄레로'와 '퉁퉁퉁퉁'의 의미 맥락을 찾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이는 무용한 일이었다. '뇌 빼고 보는 쇼트폼 콘텐츠'에는 애초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브레인롯'은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꼽은 2024년 올해의 단어다. '뇌'(Brain)와 '부패'(Rot)를 합성한 용어로, 마치 뇌가 썩은 것 같은 상태를 말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쇼트폼 등 저품질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해 정신적·지적 상태가 악화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담았다.
브레인롯은 오래된 신조어다. 문명사회를 비판하며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54년 자신의 저작 '월든'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다. 물질주의에 찌든 근대 문명이 정신적·지적 문제에 소홀한 점을 꼬집기 위해 사용됐다. 이 같은 단어가 쇼트폼의 도파민에 찌든 현대 사회에 다시 소환된 건 우연이 아닐 터다.
이탈리안 브레인롯은 쇼트폼 시대를 관통하는 밈이다. 쇼트폼은 현대인의 습관이 됐다. 짧게는 15초에서 길게는 3분 이내로 짧게 쪼갠 영상은 일상의 빈틈을 차지했다. 책 읽을 시간은 없지만, 침대에 누워 몇시간씩 손가락만 넘기는 이들이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고 있다. 생성형 AI로 만들어진 저품질 콘텐츠와 이에 열광하는 광경은 '브레인롯' 그 자체다.
특히 위험한 건 '요즘 애들'이다. 아이들은 맥락 없이 반복되는 쇼트폼에 영락없이 중독되고 만다. 지난달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4년 청소년 매체 이용 및 유해환경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청소년의 94.2%가 쇼트폼 콘텐츠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쇼트폼 콘텐츠는 청소년들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매체로, 초등학교 1위, 중·고등학교 2위 등 모든 학교 과정에서 상위 순위를 차지했다.
학부모들은 이에 대항해 각자도생하고 있다. 인터넷 맘카페는 아이의 쇼트폼 콘텐츠 이용을 막는 방법을 공유하는 게시글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단순 차단 방식의 통제는 어김없이 뚫리고 만다.
지난해 SNS 중독 문제를 취재하면서 교실에서 만난 상당수 10대들은 부모님이 관리하는 스마트폰 통제 앱을 "뚫어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은 각종 우회로를 줄줄 읊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의 정책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현장의 전문가들은 정부가 스마트폰 제한에 초점을 맞췄다가 디지털 리터러시가 필요하다며 이용을 독려하다가 다시 중독 치유에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0년 만에 입장을 바꿨다. 학교가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수거하고 사용을 제한하는 행위가 학생의 인권 침해라고 입장을 내왔지만, 최근 이를 뒤집었다. 인권위는 "그동안 학생 휴대전화 사용과 관련해 사이버 폭력, 성 착취물 노출 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났다"며 "더 이상 학교의 휴대전화 수거 행위가 곧바로 학생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브레인롯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발생하고 있다. 여건이 되는 부모들은 시간을 쏟고 관계를 쌓아 아이를 SNS와 쇼트폼으로부터 떼어놓을 통제력을 갖지만, 하루하루 생계를 꾸리기 바쁜 이들은 자녀들을 틈틈이 스마트폰에 내어줄 수밖에 없다. 일찍이 IT 거물들은 자녀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지 않았다.
'트랄랄레로' '퉁퉁퉁퉁'을 마냥 밈으로 웃어넘기기 힘든 이유다. '뇌 썩음' 시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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