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추위도 못막은 탄핵 정국 '수어통역'…손으로 전한 '다시 만난 세계'
[손으로 만난 세계]① 계엄 후 4개월 간 집회 지킨 수어통역사
추운 날씨·생소한 단어 '난감'…"일상에도 수어 많아졌으면"
- 김종훈 기자, 이기범 기자, 남해인 기자, 유수연 기자
(서울=뉴스1) 김종훈 이기범 남해인 유수연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아는 농인분으로부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는 카톡이 왔어요. 그걸 보면서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도 농인에게는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수어통역사 윤하원 씨(26)는 지난해 12월 3일 밤을 이렇게 기억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영상에서 수어 통역은 찾아볼 수 없었다. 농인들은 생소한 계엄 상황을 방송 자막에 나오는 일부 단어로 유추해야 했다.
윤 씨가 계엄 내용을 수어로 통역한 영상을 농인들이 모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단체대화방에 올린 이유다. 그는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농인과) 함께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12·3 비상계엄부터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까지 약 4개월, 농인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분투한 수어통역사들이 있다. 수어통역사 윤 씨와 김홍남 씨(52), 정지은 씨(44)는 이 기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 수어통역을 맡았다.
이들은 비상계엄과 윤 전 대통령 탄핵 과정 등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정보에서 농인이 소외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거리로 나왔다. 집회에는 이들을 포함해 20여 명의 수어통역사가 돌아가며 자리를 지켰다.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추위였다. 서울 광화문·여의도·용산구 한남동 관저 앞 무대에서 장시간 찬바람을 맞으며 통역을 하다 보면 어느새 손에서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 씨는 "추우면 손이 가장 먼저 얼기 시작하는데, 손이 느려지면 생각도 같이 멈추는 것 같다"며 "발언자는 말을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지?' 순간 그럴 때가 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윤 씨는 일상적인 대화와 달리 중요한 사회 현안을 통역하는 만큼 부담감도 컸다고 털어놨다. 그는 "가벼운 통역이 아니다 보니 긴장이 됐다"며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통역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뉴스를 더 많이 찾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계엄'처럼 평소에 잘 쓰지 않았던 단어를 어떻게 수어로 통역할지도 고민거리였다. 계엄 직후에는 '긴급'처럼 농인이 계엄과 유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를 차용했지만, 정확한 통역을 위해 80년대 계엄 당시 어떤 수어를 썼는지까지 찾아 헤맸다.
김 씨는 "계엄을 경험하셨던 어르신들께 직접 연락해서 '당시엔 어떻게 하셨냐'고 여쭸다"며 "(80년대) 계엄 당시 광주에 계셨던 분께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번 집회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한 노래도 수어통역사들에겐 또 다른 도전이었다. 탄핵 촉구 집회의 대표곡이 돼버린 걸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같은 가요는 비교적 통역이 수월하지만, 처음 듣거나 빠른 박자의 노래는 통역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장 통역이 어려웠던 노래 중 하나로 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꼽았다. 이 노래에는 '백설 격으로(하얀 눈처럼)', '장림(길게 뻗쳐 있는 숲)' 같은 어려운 가사들이 나오는 데, 미리 파악해 두지 않으면 현장에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씨는 "가사에 나오는 의미를 찾아서 미리 검색하고 수화로 어떻게 할지 다시 고민한다"며 "단순히 아는 노래라고 쉬운 건 아니고, 가사를 어떤 수화로 옮길지를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수어통역사들은 방송이나 집회 등 중요한 정보를 농인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인의 일상생활에도 수어통역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농인이 병원을 가거나, 집을 계약하기 위해 부동산을 가려면 통역이 필수적이다. 머리를 손질하러 미용실에 가더라도 통역 없이는 원하는대로 서비스를 받기 어렵다.
일상 통역의 경우 수어통역센터가 지원하고 있는데, 수어통역사 3명 가량만 상주하고 있어 그 수요에 비하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수어통역사들이 행정 등 다른 업무도 병행하고 있어 통역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있다.
정 씨는 "수어통역사들이 통역 의뢰를 다 소화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며 "그 수가 늘어나려면 결국 예산 문제가 걸리는데, 지원이 더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archive@dqdt.shop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편집자주 ...두 번째 대통령 탄핵, 50일도 남지 않은 21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이 어느 때보다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요즘, 소리가 아닌 손으로 세상을 전하고 접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청각장애인과 수어통역사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청각장애인과 수어통역사들의 '손으로 만난 세계'를 뉴스1이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