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내 여성·소수자 기구가 흔들린다…"계엄 사령부 된 총학"
34년만에 존폐 위기 '고대 여위'…'내란수괴' 표현 문제 삼은 한국외대
'정치적 목소리' 걸고 넘어진 총학들…"학생 자치는 원래 정치적" 반발도
- 신윤하 기자
(서울=뉴스1) 신윤하 기자 = 계엄·탄핵을 거치며 정치 담론이 활성화된 대학가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자치 기구들과 동아리들의 활동이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 대학교 총학생회들이 탄핵 정국에서의 '정치적 발언' 등을 문제 삼아 이들 기구의 재인준을 부결시키거나 징계를 추진하면서다. 대학가 차별·혐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설립됐던 역사 깊은 기구들이 설 자리를 잃으면서 학내 소수자 권익 보호에 차질이 생길 거란 우려가 나온다.
9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고려대학교 총여학생회의 후신 격인 여학생위원회(여위)와 학내 소수자를 대변하던 소수자인권위원회(소인위)가 재인준이 부결되고 지난 6일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징계 조치의 일환으로 합병됐다.
고려대 총학은 자치기구에 대한 사무실 조사 및 청문회를 열 수 있는 감사위도 신설했다. 성균관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도 지난달 15일 중앙동아리 재등록이 부결됐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선 지난달 10일 생활자치도서관 재인준이 부결됐다.
각 대학의 총학이 인권 자치 기구 및 동아리의 존속을 막아선 명분은 조금씩 다르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윤석열 전 대통령 계엄·탄핵 정국을 전후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낸 것을 문제 삼았단 공통점이 있다.
한국외대 총학생회는 생활자치도서관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성명에서 '내란 수괴'라는 표현을 쓴 것을 이유로 재인준을 부결했다. 생활자치도서관이 윤 전 대통령을 비판하고 잦은 성명을 냈다는 점 등이 총학이 내세운 재인준 부결 논리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외 고려대·성균관대 총학 등은 표면적으로는 사업의 미비함을 문제 삼았지만 그 기준이 모호하고 부당하다며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재인준 부결 과정에서 자치기구의 정치적 목소리에 대한 지적이 나온 만큼 총학이 사업의 완성도를 핑계로 사실상 학내 자치 기구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란 의혹이 제기된다.
고려대 총학의 경우 여위가 서부지법 난동 사태 후 민주주의 세미나를 열고 노동절 청년 학생 전야제 등에 참여한 것이 '여성 인권 신장에 직접적 관련이 없다'며 징계에 부쳤다. 이 과정에서 총학은 "(행사에서) 윤석열 정권을 비판하는 기조를 알고 갔느냐"는 취지로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위는 기후정의, 노동 운동 등 다양한 인권 의제들 속에서 어떤 권력 구조가 작동하고 어떻게 여성 인권을 신장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활동이라고 소명했으나 총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대 총학이 소인위의 재인준을 반대하는 표면적 이유는 '사업의 미비함'이었으나 마찬가지로 징계에 부치는 과정에서 "퇴진 집회에 왜 참여했냐", "외부 (단체) 연대가 회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 등 정치적 목소리에 대한 지적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소인위 측도 2025년도 상반기 사업 구상을 추가로 제시하는 등 소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려대 여위와 소인위처럼 '사업 계획' 등을 이유로 기구를 통합해 버리는 중징계는 이례적이다. 게다가 고려대 총학은 이번 전학대회를 통해 학내 특별 자치기구의 사무실·창고·금고·물품의 봉인 및 조사를 가능케 하고 청문회까지 열 수 있는 감사위원회를 신설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사실상 총학이 자치 기구의 활동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셈인데, 자치 기구 8개 중 6개가 소수자 인권과 관련된 단위들이다.
고려대는 여위와 소인위뿐만 아니라 애기능생활도서관 재인준을 부결하고 징계안으로서 총학생회비 배분액 100% 삭감을 의결했다. 민주학생기념사업회에 대한 재인준 역시 부결됐다.
한편 54년 역사의 성균관대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은 지난달 15일 전체동아리대표자회의에서 중앙동아리 재등록이 부결됐다. 정정헌은 '2024년도 활동사진상 인원 미비'를 근거로 재등록 감사를 받았고 대표자가 소명서를 제출하고 소명 발표를 진행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정정헌의 명부는 인원 기준을 충족했지만 활동 증명사진에 나온 인원이 적다는 게 동아리연합회의 재인준 반대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 담론이 활발한 사회 변화의 시기에 대학가에서 여성·소수자를 대변하는 자치 기구들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미투 운동으로 페미니즘 의제가 부상했던 2018년 각 대학교의 총여학생회는 학생사회에서 오히려 사라지는 '백래시'(backlash, 진보적 변화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를 겪었다.
이같은 흐름에 대학가에선 소수자 담론을 이어온 자치기구들을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대 전학대회 결과가 알려진 후 고려대 학생사회 전직 대표자·구성원들은 7일 "이번 결정이 고려대 학생사회가 그간 지켜온 가치에 심히 반한다고 판단하며 우려를 표한다"고 밝히며 연서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400여 명의 서명이 모인 것으로 파악됐다.
구성원들은 성명문에 "(특별자치기구 출범) 당대의 대의원들과 중운위원들은 이들 단체를 특별기구로 출범시켜 학생사회를 보다 평등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문제의식에 답했다"며 "과연 누가 현재의 고려대 학생사회는 더 이상 성폭력 문제도 없고 인권침해 문제도 없으며 차별이 없는 온전한 평등사회가 이룩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냐"고 지적했다. 한 졸업생은 SNS에 "계엄사령부를 자처하는 고대 총학은 각성하라"는 제목의 성명문을 게시했다.
고려대 여위 관계자는 뉴스1에 "학생사회에 전반적으로 있던 정치적 무관심과 혐오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 같다"며 "윤석열 탄핵 정국 당시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이라는 프레이밍으로 인해 둘 다 정당한 입장이란 인식이 생기고 이 때문에 '정치적 중립', '정치와 상관없는 순수한 대학생의 목소리'가 학생들에게 더욱 중요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여위 관계자는 "하지만 학생 자치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정치적"이라며 "학생회가 특정 의제에 무응답하고 응답하는 것을 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이란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으면 한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조직을 통폐합하고 없애는 것은 강력한 조치인데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됐는지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학생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됐는지 의견 수렴을 어떻게 했는지와 어떻게 통폐합에 이르게 됐는지를 투명하게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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