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TODAY] 두 나라, 두 화폐 이야기

(서울=뉴스1)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 얼마 전 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라오스의 유서 깊은 도시 루앙프라방을 일행과 함께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여럿이 움직이다 보니 라오스 말이 유창한 분에게 일행의 경비 관리를 부탁했다. 저마다 환전을 하고 그때그때 결제를 하는 것보다 단체로 하는 편이 덜 번거로울 줄만 알았던 터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현지의 화폐와 물가가 생소한 탓에 넉넉하게 환전을 했다 싶었지만 이렇다 한 것도 없이 이내 돈이 떨어져 환전소를 들락거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일행의 경비를 관리하기엔 지갑으로 감당이 되지 않아 지폐 뭉치를 넣을 돈가방이 필요할 정도였다. 이는 메콩강을 국경으로 한 태국과 라오스의 화폐 상황이 준 일종의 '환율 멀미'였다.
라오스의 화폐는 킵(Kip)인데, 1000킵은 우리 돈 67원쯤 된다.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드는 루앙프라방의 상대적으로 낮지 않은 물가로는 1만킵(약 670원)으로 살만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라오스에서는 동전은 쓰이지 않고 최저액권 500킵(약 34원)부터 2010년에 생겨난 최고액권 10만킵(약 6700원)까지 지폐로만 8종류나 통용이 된다. 반면 태국 돈 1밧은 우리 돈 40원쯤이다. 태국 밧과 라오스 킵의 교환 비율이 얼추 1 대 600에 달한다. 이방인이 겪는 밧과 킵의 '환차'는 지구 반대편에서 겪는 '시차' 못지않게 크다.
화폐의 액면가, 지폐에 쓰인 숫자로 '10000'을 놓고 보자. 태국 돈 1만밧은 대략 원화 40만원에 상응한다. 그런데 이 숫자가 메콩강을 건너 라오스로 가서 라오스 화폐 킵이 되면, 1만킵은 670원으로 쪼그라든다. 똑같은 숫자가 어느 나라, 어떤 화폐에 쓰이느냐에 따라 40만원과 670원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둔갑하게 된다. 환율과 화폐 시스템의 차이로 인해 동남아에서 국경을 넘나들다가는 이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혼란을 겪게 마련이다. 게다가 1000원짜리 물품을 구입하려 1만킵 지폐를 꺼낼 때, 우리는 마치 만원을 쓴다는 착각에 움찔하기 십상이다. 환차에 익숙해진다 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라오스에서 고액권만 들고 시장에 나섰다가는 장바구니보다 거스름돈을 담을 돈가방을 마련해야 할지도 모른다.
화폐의 높은 액면가와 낮은 구매력의 문제는 비단 이방인의 환차 충격이나 헷갈림에 그치지 않는다. 현지 사람들은 익숙해서 그러려니 하지만 그 나라에도 이건 아니라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화폐 사정이 라오스 못지않은 나라가 인도네시아다. 라오스에서도 화폐 문제를 알고는 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화폐개혁을 공론화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반면 인도네시아 일각에서 요즘 화폐개혁이란 오랜 불씨를 다시금 지피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인도네시아 화폐 루피아(Rupiah)는 동전 4종과 1000루피아에서 10만루피아까지 지폐 7종이 있다. 최고액권인 10만루피아가 우리 돈 9000원을 밑돈다. 4월 현재 기준으로 미화 1달러는 1만6700루피아쯤 된다. 그래서 액면가를 1000분의 1로 줄이자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1달러에 1000원이 넘는 환율이 경제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경제와 회계를 번잡하게 한다며 화폐개혁론이 제기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원화보다 더한 인도네시아 상황을 짐작하기 어렵진 않다.
루피아의 리디노미네이션 논의 저변에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자신감과 루피아의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일률적으로 기존 화폐의 단위만 조정해서, 가령 10만루피아를 100루피아로 표기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실질적인 구매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상거래와 회계의 효율성을 높이는 화폐개혁을 꾀한다.
루피아 개혁 문제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발발 이듬해인 2009년부터 공론화됐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주도로 2013년 정책이 입안됐지만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여건 부족 등으로 흐지부지됐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루피아 개혁 카드를 올해 들어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다시 꺼내 들었다. 4%에 불과한 낮은 인플레이션, 1560억달러에 이르는 사상 최고 외화보유액, 정치적 안정이 개혁을 실현할 근거란 주장이다. 지난해 2월 59%의 득표율로 당선된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의 정책 운용에도 기대감이 높다고 한다.
화폐의 문제를 안다고 해서 어느 나라나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공론화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증가, 화폐개혁으로 인한 다종다양한 사회적 비용 감당 문제 등 예상 가능한 장애물을 앞두고 있다. 돈을 일러 누구는 '물신(物神)'이라 했고, 누구는 '동의된 허구'일 뿐이라고 한다. 돈을 빼놓고 경제와 살림을 논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화폐를 손 볼 수 있는 동력은 어디서 나올까? 소통, 혹은 정치에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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