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에 불쑥 음모론 꺼내 난타…트럼프 '모욕외교' 점입가경
남아공 대통령 앞에서 근거없는 주장 인용해 '백인 학살' 영상·기사 흔들어
라마포사 "사실 아니다" 해명 진땀…"폭력적 망신주기, 지지자들 의식한 퍼포먼스"
- 권영미 기자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리얼리티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폭력적인 정상외교를 또 한번 선보였다. 백악관을 찾은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카메라 앞에서 마주 앉은 자리에서 갑자기 근거도 없는 남아공 백인에 대한 박해와 대량 학살을 주장하고 영상을 틀었다. 트럼프는 인쇄된 기사를 카메라에 내보였고 라마포사를 추궁했는데, 해외 언론들은 이를 '매복 공격(ambush)'으로 부르며 허탈해했다.
21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과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텔레비전 카메라가 돌아가고 차분한 논의가 오가는 가운데, 트럼프는 한 기자로부터 남아공의 '백인 학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받았다.
라마포사 대통령이 먼저 "남아공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답했고,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보좌관에게 "조명을 낮추고" 텔레비전을 켜 달라고 부탁하며 준비한 몇 가지를 내보였다. 트럼프의 최측근이자 남아공 출신의 억만장자인 일론 머스크는 소파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TV 스크린에 비친 영상에는 남아공의 주요 야당 인사인 줄리어스 말레마가 주도하는 집회 장면이 나왔다. 급진 좌파 정당 대표인 그는 "보어인(네덜란드 이주민)을 쏴라, 농부를 쏴라"는 구호를 외쳤다.
언론을 자주 비판해 온 트럼프 대통령은 출처가 불분명한 사진들을 내보였다. 트럼프는 기사 인쇄물을 넘기며 "죽음, 죽음, 죽음, 끔찍한 죽음"이라고 중얼거렸다. '백인 농부들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트럼프는 간단히 "남아공"이라고 대답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충격을 받은 듯 말없이 지켜봤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영상이 일부 정치인의 주장일 뿐 남아공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며 "누구도 토지를 빼앗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만약에 학살이 있었다면 여기 세 분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라며 그와 함께 온 남아공 대표단인 골프선수 어니 엘스와 레티프 구센, 그리고 남아공 최고 부호 요한 루퍼트를 언급했다.
백악관의 이런 순간은 계획된 것이었다. 라마포사 대통령이 오기 직전 백악관 참모들이 대형 TV 두 대를 차도로 밀어 회담 장소로 옮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회담이 끝나자마자 틀었던 영상을 백악관은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 게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의 중 흔들어 보인 기사들은 참모진에 의해 온라인에 체계적으로 공유되었다.
남아공 내 백인 학대 의혹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집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특히 최근 수개월 동안 남아공 백인 농부들이 토지를 압류당하고 대량 학살당하고 있다고 근거 없이 주장해 왔다.
첫 임기에도 토지를 잃은 백인 농부들을 돕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지만, 두 번째 임기 시작 몇 달 동안 그의 "대량 학살" 주장은 상당히 증가했다고 CNN은 전했다. 게다가 다른 난민에는 가혹한 트럼프와 백악관이지만 바로 지난주, 백악관으로부터 난민 지위를 부여받은 백인 남아공인 59명이 미국에 도착했다.
트럼프는 지난 2월 28일 백악관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불러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도 그의 복장을 문제 삼고 미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과시하며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는 식으로 거칠게 몰아붙이며 국제사회에 놀라움을 안긴 바 있다. 당시에도 트럼프와 백악관이 젤렌스키를 망신 주기 위해 사전에 이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이러한 트럼프의 퍼포먼스적인 외교 스타일은 백악관을 방문한 해외 정상뿐 아니라 미국 국내 여론을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BBC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프로젝트의 핵심은 지지자들의 불만과 분노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유지하는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무엇을 원하는 잘 알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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