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들인 CBDC에 재뿌린 트럼프…한은 '일장춘몽' 위기[달러 코인 일상 침투]⑨
'기축통화 비견' 기대한 '아고라 프로젝트'서 美 이탈 우려…CBDC 미래 불투명
"트럼프 CBDC 반대, 연준·중국 견제 의도일 수도…의중 정밀 파악해야"
- 김혜지 기자
(서울=뉴스1) 김혜지 기자 = 테더(USDT)를 비롯한 스테이블코인의 부상은 법정통화를 기준으로 정책을 수행하는 모든 중앙은행이 고민하는 문제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금지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디지털 통화 체계 전환을 꾸준히 준비해 온 한국은행의 고심이 깊어지게 됐다.
한은은 "CBDC 도입 여부는 미정"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으나, 실제로는 글로벌 결제 인프라가 CBDC 등 디지털 통화 기반으로 전환될 가능성에 대비해 관련 기술을 고도화해 왔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로, 법정통화와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과 달리 법정통화 위상을 갖는다.
태생적으로 중앙은행들은 법정통화 위상인 CBDC와 달리 스테이블코인 거래 활성화의 경우 위협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자국 통화 수요가 줄면 통화 정책의 유효성이 약해질 수 있는 데다, 금융 불안을 야기하는 충격 발생 시 원화 등 비기축 통화의 주권 상실과 그에 따른 '달러 대체'(dollarization·달러라이제이션)가 빨라질 수 있다.
한은이 지난 21일 발간한 지급결제 보고서를 보면 이 같은 우려는 명확히 드러난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은 일반 가상자산과 달리 지급 수단 특성을 내재해 이용이 확대될 경우 법정통화 수요를 대체하며 통화 주권을 침해하고 통화정책 유효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한은은 스테이블코인 관련 제도 논의에 있어 '신중한 검토'를 촉구하는 입장이다.
한은의 CBDC 개발 노력의 대표적인 결실은 국제결제은행(BIS)이 주도한 국경 간 결제 인프라 개혁 프로젝트 '아고라(Agorá)' 참여였다. 한은은 지난해 4월 비기축 통화국 중 유일하게 멕시코 중앙은행과 함께 참여했고, 해당 소식을 발표할 당시 한은 관계자들은 한국 경제의 통화 관련 거버넌스 역량 향상을 조심스레 기대했다.
신현송 BIS 통화경제국장은 지난해 6월 "한국의 아고라 프로젝트 참여는 글로벌 금융 인프라의 새 기준을 설정하는 작업에 처음부터 동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고라는 효율적이지 못한 국가 간 지급 과정의 문제를 토큰화 기술로 개선하려는 시도이며, 실제 환거래 업무가 토큰 기반 금융시장 인프라(FMI) 위에서 작동할 수 있다는 구상을 전제로 한다고 설명했다.
BIS와 한은 등에 따르면 기존 외환 결제는 서로 다른 법규와 기술 요건, 시간대 차이로 인해 느리고 비용이 높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아고라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 즉 기관용 CBDC(wholesale CBDC)와 토큰화된 은행 예금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지급 시스템을 추구한다.
프로젝트에는 5대 기축통화국(미국·영국·프랑스·일본·스위스)과 한국·멕시코 등 모두 7개국 중앙은행이 참여하고, 민간 금융기관은 국제금융협회(IIF)를 통해 파트너로 연결된다. 단순 실험이 아니라 실제 미래 글로벌 지급결제에 쓰일 만한 프로토타입의 시스템 구축이 목표로, BIS 관련 프로젝트 중 최대 규모다.
프로젝트 참여는 한은의 예금 토큰 기반 CBDC 연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평가됐다. 또 한은 관계자들은 아고라 참여 발표 당시 "새로운 국경 간 지급결제 인프라 개발에 비기축 통화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내심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내 민간 금융기관이 아고라 프로젝트를 통해 국경 간 지급 서비스 혁신에 참여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도 봤다. 실제로 작년 9월 아고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40여개 민간 기관 중 국내 6개 은행(국민·농협·기업·신한·우리·하나)이 선정됐다.
그러나 미국이 발을 빼면서 프로젝트의 근간이 흔들리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CBDC 금지 명령 이후, CBDC를 기반으로 하는 아고라 프로젝트의 지속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익과 개인 금융 거래의 감시·통제 방지 등을 위해 원칙적으로 CBDC 발행을 금지했으며,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도 임기 동안 CBDC 발행 의사가 없다고 못 박았다.
자연스레 미국이 참여하는 BIS 프로젝트에서 미국의 이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 밖에 다른 국경 간 거래 프로젝트에서도 CBDC 기반 플랫폼이 발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실제 도입 지연이 발생할 것이라는 견해가 고개를 들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CBDC와 함께 원화 기반 민간 스테이블 코인 육성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여전히 CBDC 중심의 전략 기조를 고수 중이다. CBDC 발전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던 과거 2010년대 초반부터 CBDC 연구에 착수했던 것처럼, CBDC의 운명이 불투명해진 지금도 기술 준비를 차근차근 이어가는 모습이다.
한은은 이달 '프로젝트 한강'이라는 이름으로 CBDC 기반 예금 토큰 실거래 실험에 나섰다. 이를 통해 CBDC의 실제 유통 가능성과 사회적 수용도를 점검하고 있다. 실험 참여자 10만 명은 은행 앱을 통해 실명 전자지갑을 개설하고 자신의 예금을 CBDC 기반 예금 토큰으로 전환해 전국 약 2만 개 가맹점에서 결제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는 규제 필요성을 보다 강조하는 모습이다. 최근 한은은 "스테이블코인 도입·규제 방안 마련 시 매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은이 트럼프 대통령의 CBDC 반대에도 관련 연구를 지속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반대 입장은 표면 너머의 진의를 자세히 볼 필요성이 있다. 이를 곡해한다면 미국이 추후 CBDC를 활용하겠다는 기조로 선회할 경우 한국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CBDC 추구 가치나 목적 자체보다는,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주도의' CBDC를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됐다. 또 CBDC 분야에서 미국을 앞선 중국에 대한 견제 의도도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CBDC 중에서도 한은이 집중하고 있는 기관용 CBDC는 소매·범용(retail) CBDC와 구조적으로 달라 금융 프라이버시 보장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CBDC 반대 근거로 내세운 프라이버시 우려는 기관용 CBDC를 활용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종렬 한은 부총재보는 "미국이 개인정보 침해로 CBDC를 거부하고 스테이블코인을 장려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한은이 이에 반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미국과 한국의 방침은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은은 중앙은행이 개인에게 직접 발행하는 범용 CBDC가 아닌, 기관용 CBDC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 격인 예금 토큰을 금융 기관이 개인에게 발행토록 하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은 CBDC 발행을 금지해 미국보다 기술이 앞선 중국 등의 관련 연구 속도, 인프라 개발 등에 제동을 건 뒤, 보다 확실하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간 지급결제 체계를 노리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특히 트럼프 정부가 경계하는 범용 CBDC 연구에서 중국이 가장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미 국채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미국이 이런 목적으로 CBDC 발전 속도를 조절할 때 발생할 달러 패권의 공백을 메울 전략적 수단으로 풀이된다.
송준혁 한국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의 최대 수출품이 달러라는 점에서 트럼프 정부는 달러 패권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며 "다른 경쟁국보다 뒤처져 있는 디지털 법정통화를 서둘러 도입하기보다는 디지털 달러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글로벌 규칙이나 제도를 정비한 후까지 발행을 연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icef08@dqdt.shop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편집자주 ...정부의 외면에도 '달러'처럼 쓰이는 '달러 코인'이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달러와 연동된 '스테이블 코인' 테더(USDT) 얘기다. 달러 기축통화국 미국이 용인하면서 테더 이용이 급증하고 있다. 뉴스1은 과거에는 없던 달러 코인 현상을 진단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통해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