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장례는 내가 치른다"…일본은 1인 가구도 '상속 신탁' 가입한다고?
[초고령화는 신산업이다]② 죽기 전 유언 대신 '신탁' 남기는 일본
"이젠 부자들만 이야기 아냐"…신탁 가입하는 1인 가구 '오히토리사마‘
- 김근욱 기자
(도쿄=뉴스1) 김근욱 기자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일본에선 이름 대신 '유언 신탁'을 남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쉽게 말해, 은행에 돈을 맡기고 내가 죽으면 정해둔 사람에게 넘겨달라고 미리 약속해두는 것이다.
한국에서 신탁은 '부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일본에선 1인 가구를 포함한 서민들까지 죽음을 앞두고 이 신탁을 활용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내 장례를 치러야 하기에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일본에선 1인 가구 신탁을 이렇게 부른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재산을 나누는 수단으로 대부분 '유언'을 떠올린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가족들이 그 뜻을 존중해 깔끔하게 재산이 분배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지난 1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타미구치 요시미츠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 인생100년 응원부 이사는 "재산이 유언에 따라 집행되지 않는 사안이 많다"고 말했다. 일본 최대 신탁은행을 보유한 이 회사는 약 95년 전부터 유언을 집행하는 신탁 업무를 해왔다.
가장 큰 문제는 분쟁이다. 예를 들어 "장남이 재산의 대부분을 가져라"는 유언이 남겨졌을 때, '대부분'은 과연 얼마를 의미하는지 해석이 엇갈린다. 병간호를 도맡았던 장녀는 왜 재산을 받지 못하느냐고 반발하고, 아파트와 주식처럼 나누기 어려운 자산은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도 문제다.
타미구치 이사는 '가족 구성의 변화' 역시 유언 집행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상속 대상으로 지정된 손주가 늘어나는 경우처럼 유언 작성 당시와 가족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신탁은행들은 '유언의 집행자' 역할을 맡고 있다. '유언신탁'은 유언장 작성부터 보관, 사망 이후 집행까지를 지원한다. 일본신탁협회에 따르면 유언장 보관 건수는 2019년 말 15만 건에서 2023년 말 20만 건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타미구치 이사는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재산이 분배되길 바라지만 사망 후에는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며 "고인의 의지를 끝까지 실현하는 것이 신탁은행의 사명이다"고 말했다. 신탁은행은 유언 집행의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다.
최근에는 '유언대용신탁'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종이 유언장을 따로 작성하지 않아도, 생전 은행과의 계약을 통해 재산을 즉시 분배하는 구조다. 유언대용신탁은 누적 계약 건수도 2019년 말 18만8500건에서 2023년 말 24만7900건으로 증가했다.
일본신탁협회 관계자는 "유언신탁은 상속 절차가 복잡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은 복잡한 절차 없이 자산을 이전할 수 있다는 점이 큰 강점이다"고 말한다. 유언이 아닌 '계약'에 기반한 구조이기 때문에, 사망 후 고인의 예금 계좌에서 지정된 수익자에게 자동 송금된다.
게다가 별다른 수수료도 없다. 이 관계자는 "생전에 자산을 맡긴 은행이 이를 운용해 이익을 얻기 때문에 사망 후 자산 이전에 별도의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최근 일본 고령자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상품 중 하나는 '오히토리사마신탁'(독신 신탁)이다. 통상 1인 가구의 요양·장례는 가까운 가족이 없을 경우 '먼 친척'이 맡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서로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은 사망 후 신변 정리에 필요한 △친족 및 지인 연락 △주거 정리 △반려동물 관리 △SNS 계정 폐쇄 △생전 계약 해지 △유품 정리 등 다양한 절차를 지원한다. 신탁 금액에서 장례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자산은 계약자가 지정한 상속인에게 전달된다.
이 서비스는 특히 '1인 가구의 사후 정리'라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일본 금융권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타미구치 이사는 "장례를 먼 친척에게 맡기지 않아도 되고, 장례뿐만 아니라 사후 정리까지 은행이 맡아주니 안심된다는 반응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1인 가구의 신탁 가입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메이와쿠(迷惑) 문화가 뿌리 깊은 사회다.
한국은 아직 상속신탁 시장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베이비부머 연령층(1955~1974년)은 일본 베이비부머 세대(1947~1974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 일본에 비해 상속 시장의 발전 속도가 느린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한국의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10년 내 '상속의 시대'가 본격 도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지홍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원은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속도가 영국 50년, 미국 15년, 일본 10년에 비해 우리나라는 7년에 불과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짚었다.
실제 5대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의 유언대용신탁 누적 잔액은 2022년 말 2조원대에서 2023년 말 3조200억 원, 2024년 말 3조5400억 원으로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미쓰이스미토모 신탁그룹은 지난해 말 기준 총 자산 78조3000억 엔(약 783조 원) 규모의 일본 4대 금융그룹으로, 신탁과 부동산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4년부터 하나금융그룹과 업무협약을 맺고 신탁 노하우를 국내 시장에 전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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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저출산과 고령화는 '정해진 미래'다. 이미 시작된 '인구의 계절'은 되돌릴 수 없다. 이 흐름은 한국을 '1% 저성장'이라는 그늘로 데려왔다. 하지만 시선을 바꾸는 순간, 위기는 기회가 된다. 2007년 세계 최초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 일본 기업들은 고령자를 소비자이자 '시장의 중심'으로 바라보고 새 판을 짰다. 이제 같은 길목에 선 한국에게 일본은 가장 중요한 참고서다. 초고령화를 신산업의 기회로 삼아야 노인도 살고, 국가도 산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