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극렬 마가 칼질에 몰락한 美 네오콘[최종일의 월드 뷰]
- 최종일 선임기자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이달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을 통해 "다음 미국 유엔 대사로 (마이크) 왈츠(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지명을 기쁘게 발표한다"고 밝혔다. 전보 인사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론 '시그널 게이트'로 물의를 빚은 왈츠가 좌천된,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육군 대령 출신으로 플로리다에서 하원의원을 지낸 왈츠는 트럼프 2기에서 교체된 첫 각료급 고위 인사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대표적 인물인 딕 체니 전 부통령의 대테러 고문역을 맡았던 왈츠의 입지는 젊은 극우 선동가 로라 루머(Laura Loomer)의 눈밖에 나면서 이미 예정돼 있었다. 1993년생으로 32세인 그녀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정치의 열렬한 지지자다. 4월 3일 백악관에서 약 30분간 트럼프를 만난 자리에서 왈츠 휘하의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간부 여러 명을 신랄하게 품평했다.
네오콘 성향의 이들이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루머의 주장을, 트럼프는 곧장 수용했다. 공군 대장 출신인 팀 하우 국장을 비롯해 간부 6명이 옷을 벗었다. 왈츠 손발이 다 잘렸다. 이날 면담엔 JD 밴스 부통령과 수지 와일즈 백악관 비서실장,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 등이 동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왈츠는 뒤늦게 이 자리에 들어와 자기 참모들을 변호했지만 지킬 힘이 없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자칭 "자랑스러운 이슬람 혐오자"인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가 미국 외교안보 수장을 누르고 NSC 간부들을 해임했다. CNN은 "루머가 트럼프의 귀를 사로잡았다"고 했다.
트럼프 1기에서 대북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알렉스 웡 NSC 수석 부보좌관도 왈츠와 함께 이번에 물러났다. 루머는 지난 3월부터 시그널 게이트에 중국이 개입했을 수 있다면서 홍콩에 있는 웡의 장인이 중국 정부를 위해 일해 왔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웡의 아내는 1·6 미 의회 폭동 가담자들 기소에 관여한 검사라고도 했다. 앞서 트럼프는 웡의 지명 사실을 언급하며 "그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과 나의 정상회담 협상을 도왔다"고 소개할 정도로 애정을 드러냈지만 마가의 입김이 더욱 셌다.
트럼프 2기의 '비선 실세'쯤으로 떠오른 루머는 '대안우파(Alt-Right)'에 가담하며 극우 운동을 시작했다. 2017년 10월 뉴욕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추종자가 트럭 돌진 테러를 벌이자 반이슬람 폭언을 퍼부으며 차량 공유 서비스 측에 무슬림 운전자 금지를 요구해 주목받았다.
상대 진영에 대한 극도의 공격성과 쇼맨십으로 극우 진영에서 존재감을 키우면서 트럼프와도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11월엔 혐오발언으로 트위터 사용이 막히자 뉴욕에 있는 트위터 본사 정문 문고리와 자신의 한 손을 수갑 채워 2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1월엔 불법 체류자 남성 3명과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낸시 펠로시의 캘리포니아 저택 울타리를 넘어 들어갔고, 이를 동영상으로 찍어 공개했다. 영상 제목은 '낸시 펠로시의 저택도 불법 외국인에겐 성역이 아니다'였다.
트럼프와의 동행은 늘어났다. 지난해 루머는 TV토론이 열린 필라델피아에 트럼프와 함께 도착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9·11에 대해 "내부 소행" 음모론을 제기한 루머가 9·11 추모식을 찾아 논란이 되자 트럼프의 측근들은 루머의 대선캠프 접근을 막았다. 논란은 핑계였다. 도발적인 행동과 선동적 발언 수준은 트럼프 참모들조차 수용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트럼프 충성파'로 이름을 떨치는 마조리 테일러 그린 하원의원도 루머에 대해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 "끔찍한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한 적 있다.
그럼에도 루머는 트럼프 2기 출범 후 더 위세를 떨치며 공화당 진영을 휘젓더니 이제는 '진(眞)트럼프 감별사'가 됐다. 충성심이 의심되는 행정부 관리들을 추적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꾸리고 '반대파 조사'(opposition research)를 벌인다. 반대파 조사는 주로 정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벌이는 뒷조사를 말한다. 그녀가 '좌표'를 찍으면 당사자를 겨냥해 "루머에게 찍혔다(Loomered)"고 선언하고 조직적인 공격으로 끌어내린다.
지난달엔 LA에서 금융사기 담당 검사로 활약해온 애덤 슈레이퍼가 루머가 "트럼프 혐오자"라고 비난한 지 2시간도 안 돼 해임됐다. 미국의 공중보건국장으로 지명됐던 재닛 네셰이왓 박사는 최근 지명이 취소됐는데 루머가 "(트럼프와) 이념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 뒤였다. 네셰이왓은 왈츠의 처제다. 앞서 지난 3월에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의 아들인 헌터 바이든에 대한 비밀경호국(SS)의 경호가 취소됐는데 루머가 관련 내용을 폭로한 것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2기 정부는 1기 때보다 더 충성파로 가득 채웠지만 마가들 눈엔 이걸로도 부족해 감별 작업이 벌어지는 꼴이다. 충성파들로만 이뤄진 조직이 건강할 리 없다. 트럼프 한 명으로도 100일만에 세계가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그나마 '합리적' 충성파마저 하나둘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극렬 마가의 득세가 공화당 진영 내에서 한때 번성했던 자유무역주의자들을 몰아낸 데 이어 이번 왈츠의 퇴장에서 보듯 다음 타깃이 한때 공화당 외교안보정책을 이끌었던 네오콘이 됐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미국의 보수잡지 '디 아메리칸 컨저버티브'의 커트 밀스 이사는 "(공화당 내) 이념적 개편의 신호"라고 봤다. 적극적 대외정책을 표방하며 부시 집권기에 공화당 내 주류였던 네오콘들이, 강력한 이민통제와 보호무역 등 고립주의와 기득권 타파를 들고 나온 마가 세력에 밀려나는 것이다.
이는 동맹국 한국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는 핵심 외교 기조 중 하나로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을 이행했다. 1기 트럼프에서 훼손된, 동맹국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면서도 미국 중산층을 의식한 외교정책을 선택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를 일부 수용한 것이었다. 변화된 미국인들의 여론을 정책에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4년 뒤에 다시 미국 민주당 정부가 출범한다 해도 고립주의 기조가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 NBC 방송이 지난 3월 7일부터 11일까지 유권자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자신이 마가 지지자라고 답한 이들은 36%였다. 이는 2023년(23%)과 2024년(27%) 조사보다 크게 늘었다. 루머의 활약에 따라 이 수치는 어디까지 높아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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